조현선 개인전 Hyunsun Jo : Pale Deep [페일딥] (10.5~10.24, 2024)


■ 전시 정보

▪ 전시 제목 : 《Pale Deep》 [페일딥]

▪ 참여 작가 : 조현선

▪ 전시 기획 : 박정원

▪ 글 : 신지현

▪ 전시 기간 : 2024년 10월 5(토) ~ 10월 24일(목)

▪ 운영 시간 : 화~일요일 13:00~18:00/ 월요일 휴무

▪ 전시 장소 : 페이지룸8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11길 73-10 1층 상가) www.pageroom8.com

▪ 전시 장르 및 규모 : 회화/드로잉 24점

▪ 문의 : 페이지룸8  02-732-3088 pageroom8@naver.com



■ 전시 소개 (기획 글)


 페이지룸8 박정원 디렉터


  페이지룸8은 10월 5일부터 10월 24일까지 조현선 작가의 개인전, 《Pale Deep》 [페일딥]을 개최한다. 조현선 작가는 작가만의 추상 하기를 통하여 추상 회화를 그리는데, 그 과정은 캔버스와 종이 작업의 제작 기간을 번갈아 가며 진행하는 형식을 자연스럽게 갖추게 되었다. 조현선 작가가 지향하는 ‘추상 회화’는 ‘추상’을 탐구하기 위한 방법의 연대기와 그 맥락을 함께 한다. 그래서 자신의 작품이 모티프가 되어 자체적으로 추상하는 방법과 제작 과정이 혼재되는 중에 회화가 제작되는 것이 특징이다.

 

 작품의 이미지 일부를 확대하거나 작품에 있는 색을 중심으로 변주하는 등 추상 회화라는 공동 목표를 가지고 연쇄하는 이미지들은 2015년 〈위장된 오렌지(Camouflaged Orange)〉 작품을 시작으로 9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다. 이 작품들을 작가는 ‘반달 색인’이라고 명명하는데, 반달 색인이 작품의 시리즈 일부인 동시에, 작가의 추상하는 태도와 방법임을 표식한다. 다음 작업을 예고하는 작품의 레퍼런스이자 백과사전형으로 존재하는 반달 색인 작업들은 작가가 사용하는 색채와 형태에 따라 소제목을 붙였다. 단, 2023년 ‘퍼들 점퍼 Puddle Jumper’ 시리즈 작품부터 반달 색인이라는 명칭이 잠정 생략되었다.

 

 이번 전시 《Pale Deep》에서 조현선 작가가 주목하는 점은 “신체성(physicality)”이다. 작가의 붓이 오가는 자리를 시각이 좇고, 동시에 그의 신체가 움직이면서 직관을 수용하고 감각적으로 색채와 형태들을 선택해 나간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작가의 작품 세계에서 습득된 ‘자율성’은 어쩌면 그동안의 추상을 위한 훈련 방법이었던 ‘반달 색인’에 기인한 것이라고 여겨도 무방할 것이다. 조현선 작가의 “Pale Deep”은 색면의 층위 안에서도 부드러움과 투명도를 잃지 않을 정도로 점차 작가만의 추상 회화의 수려한 변화를 목도할 수 있는 전시이다. 무엇보다 순간순간 다른 속도감의 붓 터치들이 표면 아래의 색감까지 은은하게 품으며 서로 공존하고 율동감 또한 더해지는 점이 탁월하다. 그런 지점을 볼 수 있는 100호 3점과 0~4호 사이즈 캔버스 소품, 오일파스텔 드로잉의 변주를 잘 살펴봐 주시길 바란다.

 


■ 작가론  

편집자주) 신지현 필자가 2021년과 2024년에 걸쳐 쓴 글 2편을 보실 수 있습니다.


〈eccĕ pictūra : 작은 조각으로 큰 아틀라스 그리기〉(2021)

글 신지현



1. 펼치기

     더이상 새로울 게 없는 세계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과거를 돌아보고, 역사를 인용하며 그 안에서 새로움을 창조해낸다. 참조된 오늘은 현재를 견인하며 미래로 나아간다. 그렇다면 예술의 경우는 어떠한가? 정말 새로운 것이 없는 시대라면, ‘나’를 재료 삼아 변주하고 틀을 짓고 그 안에서 새로움의 가능성을 창출해 낼 수도 있지 않을까? 여기, 이 그림을 보자. 조현선은 자신의 전작(前作)을 매개로 작업을 파생해 나아가며 거대한 이미지 아틀라스를 지어낸다. 그의 그림은 스스로를 참조점 삼아 확장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자생적이다. 전작을 다시 살펴 (마음에 드는) 부분만 살려두기, 살려둔 부분에 덧대어 다시 그리기. 과거 작업에서 발췌된 작은 조각(piece)을 새로운 생명을 가진 독립체로서의 ‘다른 그림’으로 파생시키는 행위는 조현선이 구사하는 방법론의 근간이 된다. 그렇기에 초기 작업에서 징후적으로 반복된 나비 문양[1]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2015년 최초 등장한 〈위장된 오렌지〉는 본격 발췌-화(畫)가 되며 작업의 주요한 축을 이룬다. 이는 그가 작업 안에서 화두로 삼는 “무엇을 그리느냐 보다 어떻게 그리느냐”에 대한 작가적 대응이 드러나는 대목이 되겠다. 이 글은 조현선의 초기작부터 근작까지를 톺아 몇몇 중요한 지점을 짚고 “어떻게”를 중심으로 그가 지어 올리고 있는 세계를 살펴보려는 시도이다.


2. 파고들기

     2021년 현재의 시점에서 조현선의 작업을 이해하기/살펴보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반달 색인’으로부터 시작해야만 할 것이다. 〈반달 색인_위장된 오렌지_초콜릿〉 연작으로만 구성된 작년 11월의 개인전 《셔플》(2021, 라흰갤러리)이 보여준 면모가 그러했고, 그로부터 넉 달 전 열렸던 두 개의 2인전에서의 작품들이 그러했듯[2] 근래의 전시만 빠르게 보아도 ‘반달 색인’이 현재 작가의 작업 세계 안에서 중요한 지표임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기 때문이다.
‘반달 색인’이라는 단어에서 짐작 가능하듯, 그것은 조현선의 작업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작가가 배열해 놓은 하나의 힌트가 된다. 그러나 작업을 통해 표면적으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암호 같은 제목과 이에 따라붙는 추상성의 화면일 뿐이다. 반복되는 이미지 사이 지지체, 색, 질감 등 미세한 단차가 눈에 띄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부터 해석의 실마리를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으레 ‘추상’의 역할이 그러했듯, 이 작업들 역시 절대적 완결성을 띠며 그렇게 평면 속에 박제되어 있는 듯 보인다. 사건의 첫머리를 찾기 위해선 작업의 전체적 조감도를 살필 필요가 있겠다. 좀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 작업의 결을 크게 회화와 드로잉으로 나누어 보자. 둘의 큰 차이는 표면적으론 (당연하게도) 지지체와 재료에서의 차이가 되겠고,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작업과 종이에 오일 파스텔로 그린 작업으로 분류된다.

*
조현선이 그리는 추상성의 회화는 특정한 내적 구조를 갖는다기보다는 직관에 의해 구성된 몸짓(gestural)의 결과물에 가깝다. 머릿속에 떠오른 구상(idea)을 그림으로 옮기는 것이 회화의 기본 작동 원리이고, 여기에는 캔버스에 발라놓은 유화 물감이 마르는 물리적 소요 시간이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서 따라붙는다고 할 때, 시시때때로 변하는 생각의 속도에 맞추어 그의 그림 역시 마르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한 채 계속해서 변화한다. 생각이 몸짓을 통해 화면에 반영되기까지 오가는 시차 안에서 발생하는 감각의 변화는 화면을 “뭉개고 덧바르고 으깨며” 〈뭉개고 덧바르고 으깨며〉(2011~) 연작을 탄생시킨다. 이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치밀하고도 솔직하게, 또 온전히 화면에 담아내고 싶었던 작가의 (완벽주의적) 성향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자 (살아있는 혹은 움직이는) 생각의 스코어(score)를 기록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생각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의 지지체라는 조건 안에 존재하는 ‘이미지’란 생각의 모방(mimesis)이자 흔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정확성이나 객관적 사실이 아닌 전적으로 작가의 감각에 의거한 것이기에 그 자체로 독자적 자율성을 가진 오롯한 추상이 되겠다. 그리고 이즈음 작가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지우는’ 변화 속에서 우연히 만들어지는 화면의 상태에 관심을 갖게 되고, ‘어떻게’의 문제에 당면하게 된다.
2015년 이전의 작업이 ‘무엇을’ 그릴 것인가에 대한 관심에 따라 일상에서 우연히 마주한 사건이나 상황의 인상, 감각을 추상적 제스처로 치환해 내는 것이었다고 한다면[3], 이후 ‘어떻게’ 그리느냐의 문제를 통해 작가는 방법론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물감을 건조시켜야 하는 물리적 조건이 기다림과 재고의 시간을 담보하고 그것이 “뭉개고 덧바르고 으깨는” 과정으로 그를 이끌어왔다면, 이후의 작업은 더 나아가 원하는 부분을 골라 본뜨고 잘라내(cut-out) 포토샵으로 레이어를 복사하듯 반복해서 겹쳐 그리는 방식을 실험하는 것에 집중한다. 좌우 상하 반전, 줌인 아웃 등의 변주를 감행하며 이 시기 그려진 〈위장된 오렌지〉(2015)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반달 색인〉(2017~) 연작의 시발점이라 하겠다. 또한 ‘직관적 화면’에서 ‘구축된 화면’으로의 이행이자 조현선의 작업을 이루는 또 다른 파트인 ‘드로잉’으로의 자연스러운 연계를 이끄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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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선의 작업 안에서 드로잉은 ‘발췌’를 기본으로 하는 〈반달 색인〉 연작으로만 구성된다는 점에서, 그러니까 회화를 원화(Original Piece)로 갖는다는 점에서 회화에 종속되는 듯 보일 수도 있겠으나 이때의 드로잉은 회화를 위한 개념 구상의 과정이 아닌 하나의 독립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회화와는 다른 역할을 성취한다. 종이에 오일 파스텔을 주재료로 활용하는 드로잉은 회화와 달리 색을 중첩시키거나 보다 자유로운 몸짓의 흔적을 극명하게 드러낼 수 없는 재료적 특성을 지닌다. 이 둘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계획의 유무’라 하겠다. 전작에서 참조할 부분을 결정하고, 색과 그리기의 강도, 움직임의 모양, 화면 속 배치 등을 차례차례 결정하며 〈반달 색인〉 드로잉은 (직관적으로 행해지는 회화와는 달리) 철저한 계획 하에 ‘구축’된다. 이후 이 드로잉들은 규칙에 의거한 이름으로 호명되는데, 기본적으로 작업에 사용/참조된 재료의 정보값을 따른다. 이를테면 〈반달색인_위장된 오렌지_O.S.MB〉에서 “위장된 오렌지”는 이 〈반달 색인〉의 원화의 제목을 인용한 것이고, 그 뒤에 따라붙는 알파벳 “O.S.MB”는 그리기에 사용한 오일 파스텔 색상의 이니셜인 식이다.[4] 이는 작가의 작업적 성향과 궤를 나란히 하는 선택으로, 어떠한 재현이 아닌 과정과 방법론 그 자체를 오롯이 담아내는 탐구자이자 기록자의 시선으로 작품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드로잉으로 파생한 〈반달 색인〉 연작은 2018년 이후 다시 캔버스로 옮아오며 (드로잉 과정을 통해) 구축된 화면을 (재)참조하며 다층적 화면을 (재)구축해내는 회화에 이르른다. 자 이제 다시 돌아온 이 그림을 우리는 단지 추상의 자장 안에서 보아도 되는 것일까? 추상으로 ‘위장된’ 이 화면을 부를 새로운 이름이 필요한 것 아닐까?

3. 덮기

     아무런 정보 없이 피상적으로 살펴보자면 일견 모더니스트의 전통을 따르는 듯 보이는 조현선의 작업이었을지 모른다. 모더니스트 회화는 화면의 깊이 없음을 주장하며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평면임을 주장해왔다는 이야기를 굳이 상기시키지 않더라고, 그의 화면은 그 자체로서 완결성을 띤 ‘닫힌 화면’이자 그렇기에 엄숙하고도 절대적인 회화의 면모를 취하는 태도로 보여지기에 필요충분조건을 갖춘 듯 보인다. 추상 회화가 외부세계의 재현이 아닌 독립된 하나의 실체라 했을 때, 선과 면 그리고 그것의 중첩과 색 그 자체가 그림의 대상이 되는 조현선의 화면은 분명 그러한 논리에 부합하지만, 그렇게만 바라보는 것은 작품이 품을 수 있는 다층적 맥락을 단편적으로 만드는 동시에 보수적인 추상의 전통에 안거(安居)하는 행위일 것이다. 조현선의 회화는 ‘외부 세계’와는 단절되어 독자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분명 모더니스트로서의 면모를 드러내지만, 그 안에서 술래잡기하듯 서로의 화면을 발췌하고 탈각하고 복제하고 접합하며 확장되어 나아가고 있다는 점은 완결 아닌 ‘연결’을 지시하며, 무엇보다도 자유롭다. 추상의 역사를 긍정하면서도 그 안에서의 확장의 여지를 모색하는 과정 안에 있는 그의 작업은 지금 이 시간에도 분열하고 합성하며 몸집을 키워나간다. 작가의 세계에서 여러 번 호명되는 “위장된 오렌지”가 중요한 이유는 아마 바로 그것이 그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이자 작가가 심어놓은 장치이기 때문일 것이다. 조현선이 지어 올리는 그곳은 무시간성의 세계이자 징후적 알레고리로 가득하다. 추상의 이미지를 뒤집어쓴 채 참조를 참조하고 원본의 상징은 지워나가며 확장하는 그의 아틀라스는 (완결된 것으로의 반대말로써) 살아있는(alive) 작업이자 급진적인 면모로 과거를 발판삼아 실체를 지우며 미래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쯤에서 우리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세계 안에선 2010년에 등장했던 나비 문양이 언제고 같은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다 해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을 일이 되겠다.



  

[1] 필자가 “나비 문양”이라 지칭한 이 무늬는 작가가 “Flower Xs”라 호명하던 것들로, 2010~2012년경 작업들(2010년 모노 프린트 작업 〈A Mushing and Flower Xs_Ghost 1〉을 비롯해 2011년 작(〈뭉개고 덧바르고 으깨며〉, 116×91cm, oil and spray on canvas), 2012년 작(〈색을 걷는 밤〉, 193×260cm, oil and spray on canvas)등)에서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에 대해 작가는 “새로운 것을 가능하게 하는 필연적 과정으로서의 완곡한 거부를 표현하고자 해당 기호를 사용해 왔다”고 밝힌 바 있다.

[2]  두 개의 전시에서 조현선의 출품작은 각각 〈반달 색인_뭉개고 덧바르고 으깨며_트로피〉 연작(《PARTICLES: 오렌지와 빙하의 시간》, 2021, 갤러리밈)과 〈반달 색인_위장된 오렌지〉 연작(《Shadow Esquisse》, 2021, 페이지룸8)으로만 구성되었다.

[3] 이러한 작업적 성향은 이 시기 작품 제목에서도 드러나는데, 2012년 경 집중했던 연작 〈버려진 보석을 걷다〉이나 〈색을 걷는 밤〉(2015) 등이 이에 해당한다.

[4] 여기서의 “O”는 Orange를, “S”는 Salmon을 “MB”는 Misty Blue를 의미한다.




〈에필로그: eccĕ pictūra : 작은 조각으로 큰 아틀라스 그리기〉(2024)

글 신지현


     앤 카슨(Anne Carson)은 저서 『빨강의 자서전』 서두에서 형용사에 관한 흥미로운 언급을 한다. 그는 명사가 세상을 이름 짓고 동사는 이름을 움직이게 하며 형용사는 어딘가 다른 곳에서 와 의미의 걸쇠가 된다고 지적하며, 의미의 걸쇠는 존재를 특정성에 머무르게도 하지만 관습적 틀 너머의 관점에서 그것은 복잡한 의미의 장을 열 수 있다는 시각을 제시한다.[1] 같은 예술 작품을 앞에 두고도 관객은 동일한 감상을 할 수 없다. 비평은 언제나 작품에 형용사를 붙이지만, 작품으로 향하는 출발점이 각기 다르기에 그것은 결코 합의된 완전성에 가닿을 수 없다. 비평은 언제나 실패를 예지하는 시도에 머무르고, 작품은 다시 한번 형용사의 걸쇠로부터 자유로워질 명분을 되찾는다. 시작부터 카슨의 해석을 빌려 작품을 향하는 비평의 (불)가능성에 대해 길게 풀어놓는 이유는 조현선 개인전 《Pale Deep》을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조현선은 이번 전시 제목을 통해 ‘창백한(Pale), 깊은(Deep)’이라는 두 이질적 형용사를 나란히 배치해 뉘앙스를 패치워크 하였다. 그러나 “창백하고 깊은” 형용사적 상태가 이 그림들과 어떤 연결점이 있단 말인가? 관습적 추론의 막힌 길목이다. 두 언어와 일련의 이미지가 갖는 의미의 걸쇠를 넘어 자유로운 상상(thinking bubble)을 부추겨 본다. 상이한 출발점(source material)을 모아 포개어 보고, 과거의 작업으로부터 본뜨고 오려와 다시금 새로운 화면을 창출하는 것, 이내 복제하고 반복하는 것이 조현선의 작업 전반을 이루고 있는 하나의 갈래였다는 점을 떠올려 본다. 동사는 상태를 외부로 드러내는 것, 형용사는 상태의 내부를 담아내는 것에 가깝다고 한다면, 이 형용사—“창백하고 깊은”—를 내부적 상태, 그러니까 태도에 대한 은유로 이해해 보는 건 어떨까? 이 글은 필자가 2021년경 쓴 조현선 작가론 이후, 이번 《Pale Deep》에 이르며 포착한 태도의 변화에 관한 소고(小考)이다.


     조현선의 작업적 연대기를 구태여 훑지 않더라도, 그가 실로 오랜만에 대형 회화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꾸준히 작업을 보아온 관객이라면 쉬이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전의 회화에서 보였던 재료를 “뭉개고 덧바르고 으깨던” 방식은 더 묽게 면적인 레이어를 덧대는 방식으로 변모했고, 치밀한 계산과 구조하에 생성해 오던 근래의 “구축된 화면”은 한결 가볍게 자유로워지기를 선택한 듯하다. 일련의 변화에 대해 작가는 “퍼들 점퍼(Puddle Jumper)”라는 명사로 갈음한다. 이 단어는 ‘작은 물웅덩이를 뛰어넘는 사람’이라는 본뜻과 함께 어린아이가 물웅덩이를 뛰어넘거나 장난치는 것을 표현할 때 주로 쓰인다. 또한 물놀이 보조장치인 팔 튜브를 가리키기도 한다. 여러모로 ‘퍼들 점퍼’는 조현선이 이번에 새로이 선보이는 연작을 앞두고 스스로 갖추고자 한 태도에 붙인 이름이었을 것이다. 아직 수영이 낯선 이가 퍼들 점퍼에 의지해 물의 감각을 몸으로 받아들이듯, 조심스럽지만 자유롭게 작가는 “눈과 손이 기억하는 오래된 습관들을 뒤적이며”[2] 다시금 화면 위로 뛰어든다. 그리하여 신작 〈퍼들 점퍼〉 연작은 방향성만을 담지한 채 일정 정도의 예측 불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세계로의 투신에 다름 아니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필연적으로 과거[3]의 자신과 조우했을 것이다. 본디 자신의 전작을 참조하는 조현선의 세계이기에 이 역시 새로울 것 없는, 오히려 그다운 선택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약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과거의 자신(의 회화)을 마주하는 일은 물에 뛰어들기 전 마음처럼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물웅덩이가 갖는 고유의 특성, 외부를 반영하는 동시에 내부를 비추는 속성은 회화적 화면으로 치환돼 다층적 레이어로 반영되고, 이때 창출되는 결과물로서의 화면은 조현선의 신작이 여전히 그가 짓는 아틀라스 안에 위치함을 인식하게 한다. 온몸의 움직임과 감각이 동원될 수밖에 없는 휴먼 스케일의 화면과 두꺼운 붓의 자취를 눈으로 따르며 이 앞에서 움직였을 작가의 과정을 추론하고, 그가 화면에 오롯이 담아내고자 했던 바가 무엇이었는가 유동하는 의미망을 가늠해 본다. 그리하여 조현선의 작업에 패치워크 된 내밀한 속성들은 형용사의 관습적 의미에 작품을 가두지 않는다. “일부 실체들은 더 복잡한 무엇으로 밝혀졌다”[4]는 카슨의 문장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본다.

     색면을 겹쳐 올려 하나의 화면을 짓는 작가의 화두는 이제 모양, 색, 레이어가 만들어내는 조형의 당연성과 의외성을 받아들이는 ‘자연스러움’이 된 듯하다. 일상으로부터 건져 올린 사물과 순간들은 원형(原形)으로부터 벗어나 회화적 요소로서 화면에 안착해 그 자체가 된다. 지난 시간 그가 행했던 것은 추상성의 화면과 일상, 그러니까 삶과 예술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연동하는지에 대한 가능성, 나아가 당위를 탐구하는 과정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는 이제 직관적으로 회화를 대하던 그때의 마음으로 화면을 마주한다. 과거는 현재를 만들기 위한 필연의 여정이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현재는 어떤 미래의 당위가 되어 새로움을 창출하게 될까, 그 알 수 없는 시간 속 상태를 막연히 떠올려 본다. 어쩌면 이번에도 해답은 내부에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기시감이 든다.


  

[1] 앤 카슨, 『빨강의 자서전』, 민승남[옮김], 한겨레출판, 2016, 7-12쪽 참고.

[2] 조현선 작가노트.

[3] 구체적으로는 2015년경 “직관의 화면에서 구축된 화면으로” 변화를 꾀하기 시작할 즈음을 떠올려 보았다.

[4] 앤 카슨, 『빨강의 자서전』, 민승남[옮김], 한겨레출판, 2016, 10쪽.



■ 작품 이미지


1-1. 조현선 Hyunsun Jo,〈Puddle Jumper(퍼들점퍼)_Pale Pink Arch〉, Oil on canvas, 163 x 140 cm, 2023 


1-2. 조현선 Hyunsun Jo,〈Puddle Jumper(퍼들점퍼)_Pale Pink Arch〉, Oil on canvas, 163 x 140 cm, 2023 (측면)


2. 조현선 Hyunsun Jo,〈Puddle Jumper(퍼들점퍼)_Patchwork Painting_1〉, Oil on canvas, 163 x 140 cm, 2023


3. 조현선 Hyunsun Jo,〈Puddle Jumper(퍼들점퍼)_Patchwork Painting_2〉, Oil on canvas, 163 x 140 cm, 2023


4. 조현선 Hyunsun Jo,〈Pale Deep(페일딥)_Cloudy〉, Oil on canvas, 18 x 14 cm, 2024 


5. 조현선 Hyunsun Jo,〈Thumb Index_Puddle Jumper(반달색인_퍼들점퍼)_Patchwork painting 2_Soft Mountain〉, Oil pastel on paper, 25.4 x 20.3 cm, 2024


6. 조현선 Hyunsun Jo,〈Pale Deep(페일딥)_Mountain, Dark〉, Oil pastel on paper, 25.4 x 20.3 cm, 2024


7. 조현선 Hyunsun Jo,〈Pale Deep(페일딥)_Sky, so light〉, Oil pastel on paper, 30.2 x 24.1 cm, 2024


8. 조현선 Hyunsun Jo,〈Pale Deep(페일딥)_Smell of Lightening 2〉, Oil pastel on paper, 30.2 x 24.1 cm, 2024


9. 조현선 Hyunsun Jo,〈Pale Deep(페일딥)_Smell of Lightening 5〉, Oil pastel on paper, 30.2 x 24.1 cm, 2024



(10번부터 24번까지 작품은 전시장 좌대에 매일 교체됩니다)

10. 조현선 Hyunsun Jo,〈Pale Deep(페일딥)_Lightening Days 1〉, Oil pastel on paper, 30.2 x 24.1 cm, 2024


11. 조현선 Hyunsun Jo,〈Pale Deep(페일딥)_Purple on Green〉, Oil pastel on paper, 29.7 x 22 cm, 2024


12. 조현선 Hyunsun Jo,〈Pale Deep(페일딥)_Lightening Days 2〉, Oil pastel on paper, 30.2 x 24.1 cm, 2024


13. 조현선 Hyunsun Jo,〈Pale Deep(페일딥)_Smell of Lightening 3〉, Oil pastel on paper, 25.4 x 20.3 cm, 2024


14. 조현선 Hyunsun Jo,〈Pale Deep(페일딥)_Smell of Lightening 4〉, Oil pastel on paper, 30.2 x 24.1 cm, 2024


15. 조현선 Hyunsun Jo,〈Pale Deep(페일딥)_Smell of Lightening 1〉, Oil pastel on paper, 25.4 x 20.3 cm, 2024


16. 조현선 Hyunsun Jo,〈Pale Deep(페일딥)_Smell of Lightening 6〉, Oil pastel on paper, 30.2 x 24.1 cm, 2024


17. 조현선 Hyunsun Jo,〈Pale Deep(페일딥)_Orange Bump〉, Oil on canvas, 33.3 x 24.3 cm, 2024


18. 조현선 Hyunsun Jo,〈Pale Deep(페일딥)_Light Blue Bump〉, Oil on canvas, 27.3 x 22 cm, 2024


19. 조현선 Hyunsun Jo,〈Pale Deep(페일딥)_Bit of  Blue〉, Oil on canvas, 22.7 x 16 cm, 2024


20. 조현선 Hyunsun Jo,〈Pale Deep(페일딥)_Four Pink〉, Oil on canvas, 22.7 x 16 cm, 2024


21. 조현선 Hyunsun Jo,〈Pale Deep(페일딥)_Cold Hot Pink〉, Oil on canvas, 18 x 14 cm, 2024


22. 조현선 Hyunsun Jo,〈Pale Deep(페일딥)_Greenish Stroke〉, Oil on canvas, 18 x 14 cm, 2024


23. 조현선 Hyunsun Jo,〈Pale Deep(페일딥)_Mushy〉, Oil on canvas, 18 x 14 cm, 2024


24. 조현선 Hyunsun Jo,〈Pale Deep(페일딥)_Golden Stroke〉, Oil on canvas, 18 x 14 cm, 2024



■ 전시 전경 (사진_양이언)






■ 작가 약력


조현선 Hyunsun Jo (1981~)

  

2010 MFA, California College of the Arts 회화/ 드로잉 전공

2005 BFA, San Francisco Art Institute 회화 전공

 

개인전

2024 Pale Deep, 페이지룸8, 서울

2023 Puddle Jumper, 에디트프로젝트 한남, 서울

2021 Shuffle, 라흰갤러리, 서울

2018 반달색인, 갤러리퍼플, 경기도

2012 Mushed, Covered, Crushed, 문신미술관 영상갤러리, 서울

2008 구조와 관계, 송은아트큐브, 서울

 

주요 단체전

2023 Green Luminance, 갤러리호호, 서울

추상-하기, 갤러리샘, 서울

Octo-, 페이지룸8, 서울

2022 지금 당장, 지금 여기, 뮤즈세움, 울산

2021 PARTICLES: 오렌지와 빙하의 시간(김하나, 조현선 2인전), 갤러리밈, 서울

셰도우 에스키스(윤선혜, 조현선 2인전), 페이지룸8, 서울

투명함에 대한 모든 것_동상이몽_스펙트럼, 평화문화진지, 서울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기획 마인드붐), 로얄빌딩, 서울

크리에이터스 쇼룸 전시(기획 라흰갤러리), 크리에이터스 쇼룸, 서울

Free Laundry(기획 AAPI), Gallery2, East Hampton, NY, U.S.A

2019 펼쳐진 주사위, 에이라운지, 서울

2018 이미지 속의 이미지(3인전), 아트 스페이스 휴, 파주

일상의 변주: Abstract Thought, 갤러리아 센터시티(63 아트스페이스), 천안

2017 Draft_초안(4인전), 갤러리175, 서울 외 다수 단체전 참여

 

레지던시

2018-2021 갤러리퍼플 스튜디오, 경기도

2014 인천 아트 플랫폼, 인천

2010 Root Division, 샌프란시스코,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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