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시 정보
▪ 전시 제목:《말 잇는 눈 Connecting Visions》
▪ 참여 작가: 이동근 개인전 Lee Donggeun
▪ 전시 기간: 2024년 9월 6일 ~ 9월 26일
▪ 운영 시간: 화~일 오후 1시 ~ 6시, 월요일 휴무 (*9월 18일 정상 운영/ 16, 17일 추석 휴무)
▪ 전시 장소: 페이지룸8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11길 73-10, 1층 상가)
▪ 문의: 페이지룸8 박정원 디렉터 T.02-732-3088/ pageroom8@naver.com
▪ 전시 기획: 카다로그
▪ 글: 허경(철학)
▪ 포스터 디자인: 김소이
▪ 설치: 바이스
▪ 협력: 페이지룸8
▪ 후원: 예술경영지원센터, 카다로그
* 이번 이동근 작가의 개인전은 스페이스 카다로그에서는 《말 없는 눈》, 페이지룸8에서는 《말 잇는 눈》이 동시에 개최됩니다.
Space Cadalogs 카다로그 (서울시 중구 수표로 58-1, 3층)
화~금요일 13:00 ~ 19:00
토, 일요일 13:00 ~ 18:00
■ 작가 노트
글_이동근 작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을 마주하고 있으면, 마치 내가 있어선 안 되는 곳에 서 있는 것처럼 불안한 마음이 스며든다. 하나둘 분석하고 학습하여 인지의 울타리에 현상을 잘 담아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타인, 타 장르, 타지 등,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와 유사한 정서를 담고 있다.
2023년의 여름, ‘생물학’과 ‘과학’에 빠져있던 나는 2024년 현재 ‘친환경 스마트 시티’라는 소재에 붙들려 있다. 비-전문가의 학습 일지에는 모르는 것으로 인한 틈과 그로 인해 몸부림치며 얻어낸 상상적 조형이 자리 잡고 있다. 필기처럼 진행된 초기 드로잉은 각 이야기와 형태에 어울리는 대지를 찾아 그 크기를 달리하며 변화한다.
시작하는 평면 조형에는 상징적으로 읽을 만한 것들이 포진되어 있다. 개인적인 관심사는 대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어서였을까. 글자와 도상을 탈구시키고 분류한다. 배경에서 분위기를 돋우던 영역과 그 이유의 중심에 있던 것은 각 성격의 것들끼리 모여, 독립적인 대지를 구성하고 ‘말이 없는 시각성’과 ‘말이 있는 시각성’으로 귀결된다.
‘할 수 있는 말이 없는 시각성’(“말 없는 눈”, 스페이스 카다로그)은 서사의 부재를 틈타 서서히 뒤틀리며 공간을 구획하다 결국, 말려들어 말풍선이 되어버린다. ‘내용이 있는 시각성’(“말 잇는 눈”, 페이지룸8)은 그 주변의 낯선 경계들의 좌표를 짚어주며 일지와 같이 탐구 과정의 가이드 역할을 한다. 마음속 폴더로 구분되어 있던 ‘미지’와 ‘상징’은 물리적 공간의 분화를 통해 더 극적으로 그 간극과 연결성을 보여줄 것이라 기대한다.
■ 작품 이미지

이동근 Lee Donggeun,〈기워진 중심시(모기가 된 메시아) Sewn central view points (Messiah turned into a mosquito)〉, 그림이 그려진 천을 바느질 Sewing fabric with drawings, 53 x 38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이동근 Lee Donggeun, 〈기워진 중심시(우리의 연대방식) Sewn central view points (our method of solidarity)〉, Sewing fabric with drawings, 55 x 39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기워진 중심시(3과 5의 시간) Sewn central view points (Time 3 and 5)〉, Sewing fabric with drawings, 195 x 115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기워진 중심시(유연한 배치를 위한 계획은 지켜본다) Sewn central view points (Plans for flexible composition
are watching)〉, Sewing fabric with drawings, 106 x 114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 (프란시스 케레를 위한) Handwritten drawing (for Francis kéré)〉, 종이 위에 마커, 볼펜 Marker, ballpoint pen on paper,18 x 25.5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 (원형 농장 중심의 마을 네트워크) Handwritten drawing (village network on a circular farm)〉, Marker, ballpoint pen on paper, 18 x 25.5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 (작은 동네의 나무 터치 놀이를 위한)〉, Marker, ballpoint pen on paper, 18 x 25.5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 (여유와 사랑의 동선 Handwritten drawing (travel of leisure and love)〉, Marker, ballpoint pen on paper, 18 x 25.5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 (선형적 도시와 분산형 도시를 위한 기초 리서치) Handwritten drawing (Basic research for linear and distributed cities)〉, Marker, ballpoint pen on paper, 18 x 25.5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 (선형적 도시와 분산형 도시를 위한 계획도) Handwritten drawing (plan for linear and distributed cities)〉, Marker, ballpoint pen on paper, 18 x 25.5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차가운 것을 뜨겁게 인식하기) Handwritten drawing (Recognizing cold things as hot)〉, Pen, pencil on paper, 18 x 25.5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산책로 중심 도시 계획) Handwritten drawing (promenade urban planning)〉, Pen on paper, 18 x 25.5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문화 산업단지 계획을 위한) Handwritten drawing (for cultural industrial complex planning)〉, Marker, ballpoint pen on paper, 18 x 25.5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얼룩위의 식물같은 도시 네트워크) Handwritten drawing (City network like plants on stains)〉,
Marker, ballpoint pen on paper, 20.5x23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얼룩 위의 스포츠 센터) Handwritten drawing (Sports Center on stains)〉, Marker, ballpoint pen on paper, 18 x 25.5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도시는 모기) Handwritten drawing (The city is a mosquito)〉, Pen, ink on paper, 25.5 x 18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수변 소형 도시 계획안) Handwritten drawing (waterside small city plan)〉, Pen on paper, 25.5 x 18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빈틈 없이 보려고 했는데) Handwritten drawing (I tried to see it perfectly but...)〉, Marker, ballpoint pen on paper, 25.5 x 18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파랑새) Handwritten drawing (Blue bird)〉, 펜, 토끼풀, 아크릴물감, 바인더 Pen, trifolium repens, acrylic paint, binder, 25.5 x 18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이제 막 계획을 시작했다) Handwritten drawing (just started planning)〉, Marker, ballpoint pen on paper, 25.5 x 18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정신분석학적 피보나치 수열) Handwritten drawing (psychoanalytical Fibonacci sequence)〉, Marker, ballpoint pen on paper, 25.5 x 18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인지 부조화의 틈을 채우는 수학) Handwritten drawing (mathematics to fill in the gaps of cognitive dissonance)〉, Marker, ballpoint pen on paper, 25.5 x 18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상하수도와 하천의 교류를 위한) Handwritten drawing (For exchange between water supply and sewage and rivers)〉, Marker, ballpoint pen on paper, 25.5 x 18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인간이 되기 위한 교통망시스템) Handwritten drawing (Transportation network system to become human)〉, Marker on paper, 25.5 x 18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감각적 교통로 찾기 놀이) Handwritten drawing (Finding sensory traffic route)〉, Marker on paper, 25.5 x 18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잠복천이 있는 지역 계획을 위한) Handwritten drawing (for planning areas with hidden streams)〉, Marker, ballpoint pen on paper, 25.5 x 18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군산의 새 교통 시스템을 통한 계획안) Handwritten drawing (Plan for Gunsan's new transportation system)〉, Marker, ballpoint pen on paper, 25.5 x 18 cm, 2024
■ 전시 전경 (사진_양이언)














■ 전시 글
글_허경ㆍ철학학교 혜윰
오직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만,
- 이동근의 이미지/텍스트 작업, 그리고 현대의 조건
“완전히 합리적이 되려는 시도는 완전히 비합리적이다.” - 존 케이지
“놀이는 그 결과를 모르는 한에서만 흥미롭다.” - 미셸 푸코
“해설이 없었다면, 작품이 훨씬 명료했을 텐데!” - 프리드리히 니체
“오직 모를 뿐.” - 숭산 스님
1. 들어가면서 - ‘친절하지 않은’ 작업?
이동근의 작업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은 어려웠다. 기존의 비평을 모두 읽어보아도, 내가 쓰고 싶은 그런 이야기는 보이지 않았다(그리고 거의 모두 나처럼 조금 ‘난감한’ 상황에 직면하여 글을 썼다고, 나는 읽었다). 모든 작가의 모든 작업이 다 그렇겠지만, 내게 이동근의 작업은 이야기하려 들면 무한한 이야기를 해야 하고, 이야기하지 않으려 들면 전혀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그런 작업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차라리, 이동근의 작업은 이른바 해설이나 설명이 전혀 필요 없는 작업, 아무것도 감추거나 숨겨져 있지 않아서, 보는 대로 다 드러나는 작업,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명백하여 오히려 잘 보이지 않는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내게, 이동근의 작업은, 글이든 그림이든, 그냥 보고 느끼고 즐기면 되는 작업이다. 때로는 의미를 부여지 않는 것이 더 낫다. 물론 비평은 다른 일이다. 작가 노트가 해설이나 설명이 아니듯, 설령 그런 측면을 반드시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비평은 근본적으로 작가와 작업에 대한 해설이나 설명이 아니다. 비평 역시 비평가가 수행하는 또 하나의 작업이다.1) 하여, 나는 사정이 허락하는 한에서 작가와 대화하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쏟았다. 매번 두 시간에서 세 시간 정도 이어지는 서너 차례의 만남과 대화가 진행되어, 내 마음속에 작업에 대한 약간의 그림이 그려졌을 때조차도, 마지막 연결고리가 잡히지 않았다. 설명이든 해설이든 전혀 덧붙일 것이 없는 작업, 있는 그대로 명백하여, 그냥 보면 되는 작업,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기 드문 매우 지적인 작업, 얼핏 매우 심플하며 컬러풀하고 단순한 시각 이미지 작업,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말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 ‘궁금하다’는 의미에서 - ‘어렵다’고 말하는 작업, 각각 따로 놓고 보면 사실 어려울 것도 없지만, 이미지 작업과 함께 전시장에 놓였을 때 오히려 이미지와 관계가 무엇일지 잘 잡히지 않는다는, 그리하여 결국 관객들로 하여금, 이해하고 알고 싶지만 쉽지 않다, ‘난해하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키곤 하는 텍스트 작업, 관객들에게 작업에 접근할 수 있는 열쇠, 실마리, 단서를 충분히 주지 않는 작업, 그리하여, ‘친절하지 않은’ 이 이동근의 작업에 대해,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1) 하지만 19세기 중후반 일반 메이지(明治) 지식인들이 - ‘진실/진리’(truth)의 경우처럼- 서양인들에게는 단어 그 자체로는 구분되지 않으며 오직 뉘앙스로만 구분되는 하나의 단어 critic을 ‘비평/비판’이라는 두 개의 단어로 번역한 이후, 메이지 일본의 영향 아래 있던 동아시아에서 이 단어는 두 개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나는 개인적으로 이를 ‘오염’이 아니라, ‘확장’이라고 보는 것이 생산적이라고 본다). 음악ㆍ미술ㆍ문학 비평은 음악ㆍ미술ㆍ문학 비판이다. 미술비평가는 미술비판가다. 비평/비판(批評/批判)이란 이 용어의 근본이 되는 독일어 Kritik에 대한 칸트의 규정처럼, 그러한 초월적(transcendental) 공간의 존재를 가정한다. 그러나, 상대성 원리와 양자역학의 확립 이후, 오늘 18세기 말 규정된 칸트의 이러한 ‘초월적’ 관념의 지지자는 거의, 전혀 없다. 따라서, 비평/비판의 개념 자체가 재규정되어야 한다. 이른바 오늘의 모든 비평가는 자신이 수행하는 비평/비판의 개념을 다시금 재규정해야 한다(a critic who never criticizes her/his notion of critic is in a critical condition). 그리고 이러한 재규정 작업이 바로 칸트가 비판, 또는 - 기존의 개념에 개별 현상을 복속시키는 규정적 판단을 넘어서며 - 우리로 하여금 ‘기존의 개념을 파괴하고 개념의 새로운 규정을 요청하는’ 반성적 판단이라는 개념으로 의미하고자 했던 것이다. 오늘의 비판자는 자신이 사용하는 비판의 개념을 비판적으로 사유, 곧 비판해야 한다.
2. 대화
하여, 서너 번의 대면 만남 이후, 줌으로 이루어진 마지막 만남을 시작하기 전에(그리고 전시가 시작된 이후 ‘인스타 공개 라이브 대화’의 형식으로 한 번 더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이렇게 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작업을 통해서 결국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런 생각이 왜 하필 다른 방식이 아닌 바로 이런 작업으로 나타나는가? 그리하여, 당신 작업에서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는 무엇인가? 더하여, 나는 이런 질문도 들려주었다. 작가의 작업이 사실 그렇게 난해하다고만은 생각되지 않는다. 그런데, 실은, 원래 그렇게 생각하는지 하도 들어서 그런지, 작가 자신도 스스로 어느 정도는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왜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아니라면, 여하한 이유로든, 상당수의 관객들이 작가의 작업이 ‘어렵다’고 말한다면, 아마도 작가가 본의와 달리, 작가의 ‘말’이 관객에게 제대로, 여하튼 작가의 의도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은가? 어떤 경우이든, 한 사람의 작가로서 이러한 관객의 반응을 어떻게 보는가, 나아가 관객이란 작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가? 작가는 관객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니체가 말한 대로, 하나의 동일한 대상이 무한한 해석을 허용한다. 사실 관계가 틀리지 않은 이상, 올바른 해석 따위는 없다. 다만, 오늘날의 재즈가 말하듯, 조금 더 풍부한 해석과 조금 빈곤한 해석이 있을 뿐이다. 하여, 이 글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작가의 대답을 들은, 나의 재구성이다. 그리고 들뢰즈의 말대로, 내가 말하는 이동근과 그의 작업은, 이동근보다는 차라리 나를 더 잘 보여주며, 이때 나는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이동근을 발명하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느낌과 생각이 그 대상인 나만큼이나, 주체인 당신에 대해 더 잘 말해주는 것처럼. 내가 작업을 보듯, 작업이 나를 본다.
3. 관객과의 소통? - 인력과 척력의 장
이동근은 우선 자신의 작업이 관객들에게 여하한 이유로든 ‘어렵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나의 질문에 이렇게 말한다. “그런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오래 알던 동료 작가들도 종종은 너무 어렵게 느껴지지 않겠느냐는 말을 한다. 관객을 무시한다는 말과는 다른 차원이지만, 아마도 나 자신이 작가로서 관객과의 소통에 의식적으로 크게 관심을 두지는 않았던 것 같고, 이 부분은 앞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인 듯하다.”(이 글을 위한 나와의 대화에서 인용. 앞으로도 특별한 인용 표기가 없으면 마찬가지) 순순히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생각해 보겠다고 말한다. 이 주제는 사실 생각해 볼 부분이 많다. 오늘의 작가는 관객에게 자신의 작업이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 라는 문제를 어떤 태도로 바라보아야 할까? 사실, 우선, 관객과의 소통은 가능할까? 그리고 나아가, 바람직할까? 어떻게 해도, 결국 관객은 자신의 인식-지각 틀에 의해 작업을 바라볼 것이다. 스스로는 뭐라고 믿고 생각하든, 이는 작가든 관객이든 모두 마찬가지이다. 결국, 가다머의 말처럼, 모든 이해는 조금 더 섬세한 오해이다. 이 경우, 관객과의 소통을 지향하라는 윤리적 관심에 입각한 일반적 요청은 실은 핀트가 어긋난 말이다. 이는 이해를 향한 노력을 포기하라는 말일까? 오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라는 말일까? 이해란 무엇이고, 오해란 무엇일까? 이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합의하는 일은 단순히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김용옥의 탁월한 지적처럼, 미술에 대한 모든 정의는 미술을 바로 그렇게 정의하는 자의 관심을 반영한다. 이 바라보는 마음(關心)이란 interest의 라틴어 어원이 잘 보여 주듯 두 존재 사이의 관계(inter-esse), 곧 이해(利害) 관계이다.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은 니체나, 니체의 영향을 받은 푸코나 들뢰즈라면, 미술에 대한 모든 정의는 미술을 바로 그렇게 정의하는 자가 보여주는 힘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모든 정의(定義/正義)는 권력투쟁의 장치이다. 이해와 공감에 대해서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순진하고도 단순한 ‘이해-오해, 공감-몰이해’ 도식은 이 경우 별로 생산적인 효과를 발생시키지 못하며, 스스로 알든 모르든, 오직 특정 권력 정당화의 메커니즘 안에서 회전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도,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므로, 이해와 공감이란 것이 원래 불가능하므로, 아무렇게나 해야 할까? 아니면, 오해, 그러니까 보다 섬세한 어긋남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까? 이런 질문은 정답이 있을 수 없으므로, 어떤 것이 더 생산적인 효과를 발생시키는가를 살피는 것이 더 유익하리라. 정답이란 것이 있을 수 없으므로, 어떤 것이 더 좋은 현실적 효과를 낳는가를 살핀다. 아마도 이것이 니체 이래, ‘신이 죽은’ 시대, ‘정답이 없는’ 시대의 철학하는 방법일 것이다. 정답이 아니라, 방법이다. 옳고 그름 또는 도덕적으로 옳은가 그른가, 선한가 악한가가 아니라, 어떤 것이 더 큰 유익을 가져오는가? 맹자의 견리사의(見利思義)가 아니라, 견의사리(見義思利). 이익을 보면 정의를 생각하라가 아닌, 정의를 말하는 자를 보거든, 그가 그로부터 발생하는 어떤 효과를 누리는가를 살펴라.
현대의 예술은, 그렇다고 관객과의 소통을 반드시 배제하는 것도 아니지만, 반드시 소통하고 이해하고 공감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를 차라리 이해와 오해, 공감과 비공감의 놀이, 긴장되고도 즐거운 놀이라고 부르고 싶다. 하나의 놀이는 우리가 그 결과를 모르는 한도 내에서만 흥미롭다. 이해되고 이해하며 공감을 주고 받으며 나누는 재미만이 아니라, 관객의 입장에서는, 이해되지 않고 공감 안 되는 재미, 작가의 입장에서는, 이해받지 않고/못하고 공감받지 못하는 재미, 나아가 반드시 이해와 공감을 추구하는 것만은 아닌 재미를 바라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예술이 다 이해된다면, 그것에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더욱이, 레비나스와 데리다가 더할 나위 없이 명확히 이야기하고 있듯, 이해와 공감조차도 실은 무지막지한 지배와 폭력의 또 다른 양상이다(양상인 측면이 있다). 어떤 경우이든 이해와 공감만이 강요되는 세계는, 더욱이 그것이 예술의 세계라면, 참으로 매력(魅力, 우리를 끌어당기는 힘) 없는 세계가 될 것이다. 예술가의 과제는, 특정 시공간 속에서, 공감과 폭력, 끌어당김과 밀어냄, 당기는 인력(引力)과 밀어내는 척력(斥力)을 모두 포함한 특정의 장(場), 힘의 장을 구축하는 문제이다. 실은, 예술의 세계란, 만유인력의 세계인 만큼이나, 만유척력의 세계이다.
4. 이동근의 이미지와 텍스트 - ‘평행’ 이론
이동근의 기존 전시명은 다음과 같다. 2017년 <미지를 위한 부표>(금호미술관), 2018년 <구의 여집합>(사루비아다방), 2020년 <주름이라는 관측법>(공간형&쉬프트), 2022년 <돌연변이>(윌링앤딜링), 2023년 <보는 것과 서는 것>(인천아트플랫폼). 따라서 2024년 9월 6-26일까지 두 곳의 갤러리에서 정확히 동일한 기간 동안 펼쳐진 이번 ‘평행’ 전시, 곧 스페이스 카다로그의 <말 없는 눈 silent visions>, 페이지룸8의 <말 잇는 눈 connecting visions>은 여섯/일곱 번째 전시가 된다. 말 없는 눈과 말 ‘있는’ 눈이 아니라, 말 ‘잇는’ 눈이다. 두 전시의 작업은 각기 텍스트가 없는 작업과 텍스트가 있는/잇는 작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가 다시 풀어보자면, 이 텍스트가 있는/없는 작업들은 실은 텍스트-이미지를 잇는/잊는 작업들이다. 시각 이미지를 다루는 작가 이동근에게 텍스트의 부재는 실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여, 텍스트의 부재는 작업의 디폴트 값이다. 그런데 모든 이미지 작업 또는 전시는 제목을 가지므로 실은 텍스트가 있는 작업이다. 작가와 관객은 모두 자신만의 방식(들)로 이미지와 텍스트를, 실은 모든 것과 모든 것을 잇는다. 텍스트 없음은 텍스트 없이 이미지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만들기이고(말 없는 눈), 텍스트 있음은 텍스트를 통해, 이미지와 텍스트를 잇기(말 있는 눈)이다. 눈은 있지만 말이 없으면, 눈이 스스로 드러나고, 눈도 있고 말도 있으면, 눈은 말과 이어져 나타난다. 어떤 경우에도 눈은 있고, 말은 있다가 없다가 한다. 이동근은 “운이 이어져, 두 개의 전시를 동시에 진행하게 되었다. 이제까지 작업에서 결과만 보여주고 말, 그러니까 과정을 너무 안 보여준 것 같아서, 이번에는 말과 과정을 같이 보여주는 전시(<말 있는 전시>) 하나와 결과만 보여주는 전시(<말 없는 전시>)를 같이 해보면 흥미롭겠다고 생각했다.” 얼핏, 이동근에게 눈은 상수(常數, constants)이고, 말은 나타날 수도 아닐 수도 있는 변수(變數, variants)처럼 보이지만, 이동근이 ‘무제’라는 식의 제목을 개별 작업에 대해서도 전시에 대해서도 사용하지 않았고, 늘 ‘구체적인’ 어떤 특정의 제목을 붙인다는 사실로 볼 때, 이동근에게 말과 눈은 모두 상수들이다. 더하여, 시각 이미지 작업과 함께, 이동근은 - 2014년의 소설 <라다마 그바그보>(ladama gbagbo), 2015년의 소설 <세디낙>(sedinaaq)처럼 - 소설 또는 자유로운 에세이의 형식을 띤 텍스트를, 전시에 또는 독립적으로, 종종 붙인다. <라다마 그바그보>는 코트디부아르의 실존하는 전직 대통령ㆍ독재자 ‘로랑 그바그보’의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딸 ‘라다마 그바그보’를 화자로 내세운 수기(手記) 형식의 소설이다. 가령 이렇게,
“제법 오래 걸었다. 먼 거리를 여행하며 우리라는 협주곡 위에 점점 불협화음이 추가된다. 들리지 않던 거슬리는 소리의 주인공들. 총의 멜빵끈. 소년병의 콧구멍. 중사의 주머니. 누군가의 손톱. 점잖은 화음은 사라지고, 구차한 경련들의 몸부림이 신음한다. 손톱, 손톱, 콧구멍, 주머니, 주머니, 멜빵끈, 콧구멍, 손톱, 주머니, 손톱, 손톱, 손톱, 멜빵끈, 콧구멍…. 아. 살아남은 유일한 주술사인 걸음 소리는 그들의 난잡함에 고개를 떨군다. 이대론 안 된다. 나는 주술사를 일으킨다. 격렬히 저항한다. 걸음걸이의 빈도가 잦아지고 다양한 방향으로 관절을 이용하여 바닥을 제친다. 주머니, 멜빵끈, 스읕, 콧구멍, 슈웻, 시읕, 손톱, 멜빵끈, 슈틇, 팔꿈치, 멜빵끈, 주머니. 아. 안돼. 더 격렬히. 더. 엉덩이를 흔들고 허리를 젖히고 어깨와 팔의 탄력을 이용해서. 쉩, 팔꿈치, 퉤스, 멜빵끈, 개머리판, 스퉙, 슓, 손톱, 주머니, 주머니, 쉬펣, 쉐엻, 팔꿈치, 슓, 췗, 손톱, 듋. 목을 꺽고 골반을 흔들고 격렬한 전율에 몸을 맡긴다. 그래. 조금 더, 조금만 더, 하면 돼. 저 어리숙하고 구차한 것들을 닦아버리자. 이마가 젖어들고 잔머리가 어설프게 붙어버린다. 목과 가슴골을 지난 땀방울의 행렬은 배꼽을 지나 다리 사이로 전진한다. 모든 곳이 젖어 든다. 불결한 신음들이 점점 주눅이 든다. 하나둘씩 존재의 주술 앞에 고개를 숙인다. 치유의 주술만이 무아지경의 상태에 들어간다. 그래. 쓰레기들 우릴 받들라. 닥치고 고개를 들지 말지어다. 이제야. 됐나. 진이 빠진다. 온 우주가 다 함께 어디론가로 힘을 빼앗긴다. 쑤욱. 전원이 뽑힌다.”
피디에프로 22장쯤 되는, 마치 레몽 루셀의 소설처럼 읽히는,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건 뭘까?, 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로서는 이런 소설, 이 소설이, 매우 흥미롭다.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고, 프랑스 현대철학으로 학위를 받고, 그에 따라 현대 비평이론을 공부한 내게는, 사실, 이런 글이 오히려 친숙한 편이다. 하지만, 이 소설과 이미지 작업 사이의 연관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에 생각이 미치면, 다시금 생각이 복잡해진다. 아무런 연관이 없이 그냥 읽으면 되는 걸까? 혹은 여기에는 ‘연관 없음의 연관’(프랑스 현대철학자들이 비-관계(non-lieu)의 관계라 부르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어차피 알 수 없다. 2015년에 발표한 또 다른 소설 <세디낙>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캐나다든 그린란드든 스웨덴이든, 여하튼 북극점에 가까운 어느 곳의 이누이트족, 정확히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을 화자로 내세운 소설이다. 가령, 이렇게.
“아버지의 눈은 흙더미와 바위에 눌린 채 바다를 향하고 있다. 깜빡이지 않는다. 어떤 의지가 있는 듯한 시선으로 일각수의 뿔춤을 보고 있다. 이 상태, 아니 이 상황을 멍하니 보고 있다. 개들은 저 멀리서 애타게 짖고 낑낑거리기를 반복한다.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도 않는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다가 정신을 차리고 창으로 아버지 주변의 흙을 파낸다. 하얀 털옷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땀이 난다. 쉬지 않고 흙을 파내고 바위를 던진다. 거친 호흡을 쉬지만 무슨 약이라도 맞은 듯 신체적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 몽롱한 상태에서 아버지를 끄집어내 얼음 위로 끌고 나온다. 눈을 보고 무엇이든 물어보지만 답이 없는 답으로 나를 마주한다. 가슴을 때리고 인공호흡을 시도한다. 퍽, 퍽, 퍽.”
이동근의 두 소설은 모두 아버지를 바라보는 다 큰 딸의 시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는 어떤 (무의식적) 의미가 있을까? 도식적이거나 그렇지 않은, 무한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나는, 알 수 없고 묻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조건에서만,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작가와 많은 대화를 하고 많은 질문을 묻고 또 대답을 들었지만, 내가 지금 다른 글, 가령 반듯하고 사람들이 ‘비평’이라 부르는 그런 글, 단정하고도 심플하며 정확한 글을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반복하건대, 나는 그런 글쓰기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런 글은 남들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안 읽어도 되는’ 글들이 넘쳐나는데, 거기에 내가 한 편을 더 보탤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런 글은, 매력이 없다. 푸코가 말하지 않았던가? 하나의 게임이 재미있는 것은 오직 우리가 그 결과를 모르는 한도에서라고. 나는 나 자신도 마지막을 모르는 글을 쓴다. 그런 글이, 나를 나의 바깥으로 데려간다. 오직 알 수 없으며, 오직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만, 오직 모르기 때문에만 쓸 수 있는, 그런 글.
하지만, 이 부분에서, 문제는 이것이다. 이동근의 텍스트 작업(소설)과 이미지 작업(설치와 그림) 사이의 관계는 무엇일까? 작가의 의도는 있겠지만, 어차피 무한히 묻고 또 물어야 하므로, 어느 순간에는 그쳐야 한다. 이 모든 것은, 결코 확실히 또는 결정적으로 알 수 없으며, 실은, 때로는 모르는 것이 차라리 낫다. 현대란 ‘재현 작용(representation)을 더 이상 믿지 않는 세계’를 이르는 말이기 때문이다. 현대는 ‘마지막 한 마디’가 부재하는 세계이다. 현대란 이러한 다양한 해석을 용인하고, 권장하는, 나아가 강요하는 세계이다(이를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현대를 살면서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혹은, 누군가가, 이런 소설을 읽고 이건 뭐야?, 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모든 생각은 아마도 글 자체보다는, 미술에 대한 그 누군가의 선입견이 작용한 탓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단적으로, 이는 글의 작가 이동근이 ‘내가 아는, 보다 정확히는,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미술과 작가의 개념 안쪽에 위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이 소설이, 실은 알 수 없는 것이 전혀 없고, 실은 이해할 것조차 전혀 없는데(나는 이 글을 쓰려고 대화를 나누고 생각을 정리하며, 점차 ‘이 생각이 맞다’는 생각으로 기울었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소설-미술의 이른바 ‘작가’ 개념의 그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에 내게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작업으로 비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볼 때, 이동근의 작업은 물론, 이동근의 글도, 이동근이라는 작가도, 누군가에게는(실은, 관심이 있는 누군가에게만), 조금 ‘이상하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5. 이상한 사람, 이상한 작업? - ‘지배당하는’ 정상들
이런 바깥의 작가 이동근에게 나는 다음과 같은 이상한 질문을 던져보았다. 당신은 왜 이런 작업을 하는가, 그리고 그런 생각이나 의도가 왜 하필이면 다른 방식이 아닌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는가? “나는 종종 어떤 사람이 자신만의 정원을 이렇게 또는 저렇게 가꾼 것을 본다. 그리고 그 정원을 보고 있노라면, 그 정원이 어떻든, 이런 정원을 이렇게 꾸미고 가꾸는데, 이 사람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였고, 보통 노력과 정성으로는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나는 그런 사람, 그런 장면을 보면, 내 안에 울컥하는 감정이 생기는데, 나도 바로 그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나는 사람들이 이동근이라는 이상한 사람이 있었고, 그가 내게 늘 꼭 이해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저러한 결과를 내기 위해 어마어마한 시간과 공을 들였던 사람,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나는 이해가 어렵고 드문 이 시대,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한다.” 이는 실로 이상한 답변이거나, 혹은 이상할 것이 전혀 없는 안 이상한 답변일 수 있다. 이상함 또는 이상함의 여집합. 상식은 다만 비상식의 여집합이다. 이상함이란 이상하지 않은 사람의 여집합이다. 그렇다면, 이상(異常)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보통(常)과 다르다(異)는 것이다. 가령 이상하다는 것은 때로 비정상(非正常), 정상(正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할 수도 있는데, 이때 이상하다, 정상이 아니다, 비정상이라는 말은 그저 단순히 그런 사태 혹은 사람의 ‘숫자가 적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른바 ‘색약ㆍ색맹’(色弱ㆍ色盲) 등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한국인의 경우 대략 0.5~6.0% 정도의 확률분포를 보인다고 한다. 그런데 만약 이런 사람들이 더 다수를 차지한다면 이들이 색약 또는 색맹이라 불릴 리가 만무하다. 간단히 말해, 정상과 비정상 또는 이상은 숫자의 문제이다. ‘지배적’ 정상이 지배당하는 다른 정상들, 곧 자신과 다른 정상들을 모두 비정상들, 이상한 것들이라 명명한 것이다. 따라서 정상과 비정상, 이상한 것과 이상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배적’ 정상과 ‘지배당하는’ 정상들이 있을 뿐이다. 이상한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으며, 그저 자주 못 보아서 그렇게 보일 뿐이다. 나도 너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 우리 모두 그냥 이렇다는 것, 내가 볼 때, 이동근이 자신의 작업과 삶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6. 이동근의 공간적ㆍ기하학적ㆍ집합론적 은유 - 합리성과 그 한계
한편, 이동근의 작업은, 가령 <구(球)의 여집합>처럼, 시간적이기보다는, 대부분 공간적-기하학적 또는 집합론적 은유를 기저로 삼고 있다. 실로 ‘이과적인’ 이동근의 세계는 미술/예술/기술(美術/藝術/技術)이 같은 하나의 그리스어 단어 τέχνη(tékhnē)에서 연원한 동근원(同根源)적인 단어들임을 보여준다. 이 그리스어 단어는 사실 어떤 기억, 기술과 예술, 심지어 때로는 이전 시대의 주술과도 분리되기 이전의, 기억을 품고 있다. 따라서 이동근에게 과학과 기술과 예술과 주술은 모두 같은 근원을 갖는다, 하여, 분리 불가능하다. 모든 기술과 과학이, 그리하여 예술과 주술이, 실은 인간학이다(어떤 특별한 근거도 없는 의역, 19세기 일어 번역 ‘인문학’(人文學)이란 용어는 이제 폐기 처분되어야 한다). 기술과 과학처럼, 인간학으로서의 예술은 인간의 정의(定義)를 탐구하며, 바로 그럼으로써 인간의 정의를 바꾸는 학문이다. 전통적 ‘회화과’를 나온 이동근이 ‘과학기술’이라는 이름이 붙은 학교의 대학원을 나온 것은 우연이라 치더라도, 예술가이자 미술작가인, 이동근의 전시 제목은 물론, 개별 작품의 제목 중 상당수 역시, 현저히 ‘이과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가령, <관측일지: 병합>(2020), <시선으로 펼쳐진 너>, <접기, 결합: 서기>, <다시 선 각막>, <생장한 각막>, <각막 혹은 시선>(이상 2022), <생장중인>(2023), 이 모든 것은 이동근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이동근의 이러한 기하학적ㆍ집합론적ㆍ생물학적 특징, 여하튼 ‘이과적’ 특성은 이동근이 발을 디딘 합리성의 세계라고 말하고 싶다. 오늘 세계를 지배하는 서양의 경우, 세계와 우주에 대한 수학적 관념은 서력 기원전 6-5세기 피타고라스를 필두로, 기원후 17세기 초중반 이후의 과학혁명, 18세기 중후반 이후의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며, 가히 세계의 오늘을 지배하는 사유이다. 특히 17세기 이래 데카르트-라이프니츠, 갈릴레오-뉴턴으로 대변되는 과학적 사고방식은 세계에 대한 수량화에 기초한 사고방식이다. 양적 방법론은 질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나의 이성과 너의 이성은 동일하다. 이러한 동일성에 기초한 양적 보편성의 관념이 이후 정치적 민주주의의 관념을 낳았다. 이는 근대 합리성의 모태인 이성(理性, reason, rationality)의 모태가 되는 라틴어 ratio가 계산(計算, caculation)을 의미하는 단어라는 사실에서도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결국, 이성의 세계는 ‘딱 맞아떨어지는’ 세계이다. 이동근은 불확실한 세계에서 확실성을 추구하는 데카르트처럼, 과학적 합리성에 기반하여 자신의 작업을 펼친다. 그리고 이동근의 작업은 합리성의 한계와 조건에 대한 작업으로 나아간다. 왜냐하면 합리성은 세계의 수량화에 기초한 사고방식인데, 이것이 효과를 내는 영향만큼이나, 이것이 잘 들어맞지 않는 영역이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동근의 텍스트 작업과 이미지 작업은 모두 이러한 합리성의 한계/조건에 대한 작업이다. 이동근은 세계의 이 틈새, 사이, 간극, 이 약간 어긋남을 다루는 작가이다. 따라서, 정확히 말할 수도 없지만, 정확히 말한다는 것도 한계가 역력하다. 따라서, 이동근의 작업은 아이러니와 불합리, 부조리에 대한 말놀이, 또는 말풍선처럼, 보이게 된다.2) 말놀이는 말장난이 아니다. 이동근은 진지하며, 진지하고 정확하고자 하기 때문에만, 말놀이와 그림놀이를 수행한다. 이동근은 정확하게 말하기 때문에만, 부정확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찬가지로 이동근은 정확히 그리기 때문에만, 부정확하게 그리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이동근의 한계가 아니라 이동근의 탁월함이며, 이동근이 다루는 시각적ㆍ언어적 작업 자체의 한계/조건에서 기인하는 하나의 놀이로 바라보아야 한다.3)
2) 스페이스 카다로그와 페이지룸8, 두 곳에서 동시에 열린 2024년의 두 전시는, 또 다른 이미지/테스트의 놀이를 보여준다. 스페이스 카다로그에는 모두 24점의 작품이 나왔는데, 이들은 <기워진 주변시> 시리즈 2점, <말풍선> 시리즈 5점, <미지를 향한 시선> 17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찬가지로 페이지룸8에는 모두 28점이 출품되었는데, <기워진 중심시> 4점, <사랑을 위한 예행연습> 1점, <필기 드로잉> 23점이다. 이중 <기워진 주변시>와 <말풍선>, <미지를 향한 시선> 그리고 <필기드로잉>에는 ‘도시계획의 출발점’, ‘숙성’, ‘선의 율동’, ‘프란시스 케레를 위한’ 등과 같은 소제목이 붙어 있다.
3) 이동근이 아직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은 이 합리성이 인간 자체의 합리성이 아니라, 오늘 세계를 지배하는 서양의 합리성ㆍ보편성이라는 사실이다(‘암묵적’으로는, 그의 소설 두 편이 모두 오늘 세계의 변방이라 할 아프리카와 극점 인근의 어떤 지역에서 벌어지며, 두 화자 모두 아버지를 관찰하는 젊은 여성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이런 측면이 나타난다). 서양의 합리성은 합리성 자체가 아니라, 여러 가능한 합리성 중 하나에 불과하다.
결국, 이동근의 작업은, 자신과 세계에 있어, 이미지/텍스트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작업, 그 사이와 틈을 재규정하는 작업, 이 연접/이접의 작업, 잇고/잊는 작업, 둘 각각의 정의와 둘 사이의 관계를 재규정하므로써, 그들을 (다시) 분류하는 작업이다. 모든 ‘참다운’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이동근은 이러한 작업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의식/무의식을, 나/세계를, 이미지/텍스트를 (재)구성, 곧 (재)발명하고 있는 것이다. 말/눈은 분리될 수 없는/있는 하나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동근은 둘 각각을 그리고 둘 사이를 잇고/잊는 작가이다.
7. 나가면서 - 오늘의 예술가, 오늘 나의 조건으로 작업하는 자
이른바 현대 비평의 조건이란 무엇인가? ‘결국 설명할 수 없음’이라는 이른바 부정적 한계를 ‘오직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라는 긍정적 조건으로 달리 바라보는 것, 이는 결국 현대 미술, 현대 예술 일반의 조건과도 일치한다. 설명할 수 없으므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 수행 주체가 이제까지 스스로는 ‘설명’한다고 믿어왔던 것, 즉 이미지의 보조 ‘수단’이라고 생각한 글과 텍스트는,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나 해설이 아니라, 실은 작업 자체, 적어도 작업의 일부다. 모든 작가가 정확히 알고 있고, 실제로도 바로 그렇게 지금 행하고 있듯, 개별 작업 또는 전시의 ‘제목’은 - 결코 작업에 대한 설명이나 해설이 아니라 - 19세기 메이지(明治) 일본인들이 이른바 ‘(사람들 앞에) 펼쳐 보이기’(展示)라고 번역한 어떤 특정 놀이, 관객과의 ‘놀이’ 중 일부다.
당신은 당신이 그리는 것이다(you are what you paint). 이는 당신이 있고, 당신이 무언가를 그리면, 그것이 당신이라는 말이 아니다. 내가 있고, 그 내가 옷을 입는 것이 아니다. 나란 내가 지금 입은 이 옷과 내가 빚어내는 특정한 ‘복합체’다(이것이 그레이엄 하먼이 말하는, 객체지향존재론(OOO)이다). 이런 옷, 저런 옷을 입은 ‘나들’만이 존재하며, 이들을 가로지르는 메타적 존재, 데카르트적 실체로서의 코기토, ‘나’는 없다. 이러한 세계관은 옷을 모두 벗은 상태도 옷을 입은 상태의 하나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나체가 의복이다. 무제가 제목이다.
유럽, 20세기 초, 어떤 특정 순간, 작가들은 이미지에 대한 텍스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무제’(無題, untitles)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영어 untiltled라는 용어는 1610년 최초의 용례가 발견되지만, 20세기 예술에서 이런 지칭이 사용되기 시작한 이유는 - 가령 ‘표제음악’의 경우처럼 - 텍스트 혹은 주제가 텍스트로 이루어지지 않은 예술 작업의 해석을 지배하는 현상을 탈피하기 위하여 고안된 지칭일 것이다(이렇게 보면, 20세기 이전까지의 모든 미술작품은 전혀 예외 없이 ‘표제미술’이었다). 따라서 ‘무제’라는 지칭은 예술이 이른바 주제와 내용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고유한 매체적 특성 혹은 형식적 놀이 그 자체에 집중하면서 생겨난 사태였을 것이다. 예술은 예술 그 자체의 조건과 규칙이 있다. 그것을 존중해라. 언어와 텍스트로 환원하지 마라. 이는 실로, 기원전 4세기 플라톤 이래 23세기를 이어온, 텍스트와 진리의 지배에 대항하는 유럽 예술가의 독립선언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가령 파울 클레와 바실리 칸딘스키와 르네 마그리트 그리고 또 셀 수 없는, 20세기 초반 유럽 현대 예술과 미술의 위대한 천재들이 이미지-텍스트 사이의 평행선 이론을 개발했다. 이미지와 텍스트는 두 개의 별개 존재들이되, 어느 하나가 나머지 하나로 환원되거나, 하나에 의해 다른 하나가 소거될 수도 없는 영원한 평행을 이루는 쌍둥이들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텍스트가 미셸 푸코의 1968년 쓰인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일 것이다. 이 책이 잘 보여주듯, 이러한 사유방식은 19세기 후반 니체와 말라르메로부터 준비되, 20세기 초, 소쉬르와 프로이트와 가령 레비스트로스와 라캉에 의해 대변되는 비본질주의, 비실체적, 반토대주의적(non-essentialist, non-substantial, anti-foundationalist) 사유의 탄생과 분리 불가능한 방식으로 관련되어 있다. 마치 ‘20세기 유럽 동시대 예술’(the 20th century european contemporary art)이라는 고유명사가 오늘 이곳에서 그저 ‘현대예술’이라는 보통명사로 번역되듯, 세계는 그리스와 유럽과 서양이 지배하고 있다. 스스로는 무어라 생각하건, 거의 단 한 명의 실제적 예외도 없이, 우리는 모두 그리스-로마-유럽-서양의 자식들이다(pax graeca). 보편성은 결코 보편적이지 않으며, 오직 정치적일 뿐이다.
오늘-여기, 다시 1세기 이상이 흐른 오늘, 지구의 반대편 혹은 다른 문화와 사회 속에서 태어나고 사는, 오늘-여기의 예술가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 모든 것을 포월(包越)하며, 오늘-여기의 새로운 규칙을 모색하고 있다(나는 이를 규칙의 개인화라 부른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하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닌 자세, 문제를 유지할 줄 아는 태도는 오직 그러한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다. 이동근의 말과 이미지 작업은 이동근이 문제를 유지하는 능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섣불리 함부로 말하거나 결정하지 않고, 그저 그렇게 놓아둔다, 그리고 오늘-여기에서 이것으로 작업한다, 논다, 그러한 현실과 과정 자체를 작업으로 삼아 수행한다(work, play, perform). 이동근은 이 작업이 어떻게 펼쳐지고 어떻게 끝날지 알지 못하는 한에서만 작업한다, 한계를 조건 삼아.
“변화의 가능성이 다양하고 더 많아질 수 있다고 생각한 이후, 더 불안정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자주 많은 변화를 줄 수 있는 상태를 바랐다.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지만, 유연한 천이나 끈, 종이와 같은 재질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특정 상태의 과정은 그 자체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또 다른 이미지를 더하도록 촉구했다. 그렇게 병합되다가도 이후 또. 과하여 덜어내기도 한다. 평면상의 생장과 수축의 변주는 결국 또 다른 차원을 마주하게 된다. 그 면은 만두를 싸듯 끝과 끝이 연결되어 입체로 변화하게 된다. 그 상태로 어느 정도의 변화를 가진 후, 또다시 접합되었던 곳과 다른 배면이 갈라진다. 이 과정을 두세 번 거치고 난 뒤, 보는 느낌에서 오는 만족감이 극대화되어 진행을 멈춘 것이 <생장한 각막> 시리즈이다.”(<생장한 각막> 시리즈에 붙이는 작가 노트, 2023)
그리고 이것이 바로 작가 이동근의 탁월한 측면이다. 이동근의 작업은 바로 이런 오늘-여기 새로운 규칙의 탐색 작업을 보여주는 모범적 사례이다. 결코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이런 이상한 사람 하나쯤은 있어도 되지 않겠느냐고 우리에게 되묻는, 다정하고도 무뚝뚝하며, 속마음을 털어놓으면서도 하나도 말하지 않는, 애처로움과 무심함을 함께 품게 만드는, 동시에 이 모든 것이며 이 모든 것이 아니기도 한, 이동근은 바로 세계의 이러한 얼핏 모순적이며 아이러니컬한 모습이 전혀 모순적이지도 아이러니하지도 않음을, 모순적이고도 명확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이동근은, 세계의 틈과 사이를 존중하는 태도, 섬세한 어긋남을 강력히 유지하는 태도를 통해, “완성되지 못한 문장의 띄어쓰기, 의지와 다르게 쉬어버린 숨과 같은 것”을 보여주며, “너무 이른 적절함에 당면하지 않기를 바라며, 또 다른 틈에 백지를 놓아”(작가 노트 <도래하는 것을 향한 각막과 생멸의 운동>, 2022) 두는, “파편(평면)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그것이 접합된 최종 상태 또한 여전히 변화가능한 불안정한 상태이길”(<다시 선 각막>에 붙이는 작가 노트, 2023) 바라는, 이동근의 작업은 확실성만큼이나 불확실성을 견디는 능력, 문제를 섣불리 해결하는 것이 아닌, 문제를 유지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가령, 유령인 동시에 망토인, 이동근이, <유령망토>에 붙인 2023년 7월 23일의 ‘작가 노트’가 보여주는 것처럼.
“어딘가에 들어가 있기를 바란다. 포근하게. 하지만, 애처롭게도 여전히 외부가 어디에나 있다. 보는 순간 외부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 틈과 어긋남. 잘 알지도 못하지만 그렇게 존재하는 친구 정도는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보는 것이 존재하는 것으로 생장하길. 그리 바라는 마음은 결국, 누더기가 될 수밖에 없었던 너의 몸을 통해 드러난다. 태어난 이래로 단 한 번도 완전한 적 없던 나이기에 그것의 뒤집힌 껍질 또한 당연히 그러한 것이지 않을까. 그것이 상징이 된다 한들, 또 다른 목소리가 다가올 때를 위해, 다시 반복한다.”
이동근은, 결코 저것이 아닌, 오직 이것만을 가지고 작업한다.
■ 작가 약력
이동근
b.1985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
학력
2017서울과학기술대학교,조형예술과,석사졸업
2010 홍익대학교,회화과,학부졸업
개인전
2024 말 없는 눈, 카다로그, 서울
2024 말 없는 눈, 페이지룸8, 서울 (카다로그 기획)
2022 보는 것과 서는 것,인천아트플랫폼G3, 인천
2022 돌연 변이, 스페이스윌링앤딜링, 서울
2020 주름이라는 관측법,공간형&쉬프트, 서울
2018 구의 여집합, 프로젝트스페이스사루비아다방, 서울
2017 미지를 위한 부표, 금호미술관, 서울
단체전
2023 접촉 환원, 스페이스카다로그, 서울
2023 유령 망토, 드로잉룸, 서울
2022 터치 스톤, 신한갤러리역삼, 서울
2021 작은 모닥불 앞에 둘러앉은 소원들, 스페이스카다로그, 서울
2021약속의 땅, 더그레잇컬렉션, 서울
2020 너머의 여정, 세마벙커, 서울
2020 연대의 홀씨,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광주
2019 사용된 미래, 수림아트센터, 서울
2019 유어 서치 내손안에 리서치 서비스, 두산갤러리, 서울
2018 깜빡일수록 선명한, 두산갤러리뉴욕, 미국
2016 언더 마이 스킨, 하이트갤러리,서울
레지던시
2022 인천아트플랫폼E-01
Lee Dong-geun
b. 1985, Daejeon, Korea.
Lives and works in Seoul, Korea
Educatios
2017 Seoul National University of Science & Technology. Dept. of Fine Arts, MFA, Fine Arts
2010 Hong-ikUniversity, College of Fine Arts, BFA, Painting
Solo Exhibitions
2022 Seeing and Standing, In-CheonArt Platform, G3, In-Cheon, Korea
2022 Mutant, another surface, Space willingndealing, Seoul, Korea
2020 An observation through wrinkles, HYUNG & Shift, Seoul, Korea
2018 The Complements of Sphere Arrangements, Project Space Sarubia, Seoul, Korea
2017 The Buoy for Unknown, KumhoMuseum, Seoul, Korea
Group Exhibitions
2023 Contacting presence, Space Cadalogs, Seoul, Korea
2023 Ghost Manteau, drawingRoom, seoul
2022 Touch-Stone, Shinhan-Gallery, Seoul, Korea
2021 Wishes Sitting Around A Small Bonfire, Space Cadalogs, Seoul, Korea
2021 The Promised Land, The Great Collection, Seoul, Korea
2020, The Journey of Eternity, SEMA Bunker, Seoul, Korea
2020, SOLIDARITY SPORES, ACC, Gwang-ju, Korea
2019, Used Future, KimHeeSooArt Center, Seoul, Korea
2019, Your Search, On-demand Research Service, Doosan Gallery, Seoul, Korea
2018, Tenacious After Image, Doosan Gallery, Newyork, USA
2016, UNDER MY SKIN, HITECOLLECTION, Seoul, Korea
Residency
2022, Incheon Art Platform, E-01
■ 전시 정보
▪ 전시 제목:《말 잇는 눈 Connecting Visions》
▪ 참여 작가: 이동근 개인전 Lee Donggeun
▪ 전시 기간: 2024년 9월 6일 ~ 9월 26일
▪ 운영 시간: 화~일 오후 1시 ~ 6시, 월요일 휴무 (*9월 18일 정상 운영/ 16, 17일 추석 휴무)
▪ 전시 장소: 페이지룸8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11길 73-10, 1층 상가)
▪ 문의: 페이지룸8 박정원 디렉터 T.02-732-3088/ pageroom8@naver.com
▪ 전시 기획: 카다로그
▪ 글: 허경(철학)
▪ 포스터 디자인: 김소이
▪ 설치: 바이스
▪ 협력: 페이지룸8
▪ 후원: 예술경영지원센터, 카다로그
* 이번 이동근 작가의 개인전은 스페이스 카다로그에서는 《말 없는 눈》, 페이지룸8에서는 《말 잇는 눈》이 동시에 개최됩니다.
Space Cadalogs 카다로그 (서울시 중구 수표로 58-1, 3층)
화~금요일 13:00 ~ 19:00
토, 일요일 13:00 ~ 18:00
■ 작가 노트
글_이동근 작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을 마주하고 있으면, 마치 내가 있어선 안 되는 곳에 서 있는 것처럼 불안한 마음이 스며든다. 하나둘 분석하고 학습하여 인지의 울타리에 현상을 잘 담아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타인, 타 장르, 타지 등,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와 유사한 정서를 담고 있다.
2023년의 여름, ‘생물학’과 ‘과학’에 빠져있던 나는 2024년 현재 ‘친환경 스마트 시티’라는 소재에 붙들려 있다. 비-전문가의 학습 일지에는 모르는 것으로 인한 틈과 그로 인해 몸부림치며 얻어낸 상상적 조형이 자리 잡고 있다. 필기처럼 진행된 초기 드로잉은 각 이야기와 형태에 어울리는 대지를 찾아 그 크기를 달리하며 변화한다.
시작하는 평면 조형에는 상징적으로 읽을 만한 것들이 포진되어 있다. 개인적인 관심사는 대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어서였을까. 글자와 도상을 탈구시키고 분류한다. 배경에서 분위기를 돋우던 영역과 그 이유의 중심에 있던 것은 각 성격의 것들끼리 모여, 독립적인 대지를 구성하고 ‘말이 없는 시각성’과 ‘말이 있는 시각성’으로 귀결된다.
‘할 수 있는 말이 없는 시각성’(“말 없는 눈”, 스페이스 카다로그)은 서사의 부재를 틈타 서서히 뒤틀리며 공간을 구획하다 결국, 말려들어 말풍선이 되어버린다. ‘내용이 있는 시각성’(“말 잇는 눈”, 페이지룸8)은 그 주변의 낯선 경계들의 좌표를 짚어주며 일지와 같이 탐구 과정의 가이드 역할을 한다. 마음속 폴더로 구분되어 있던 ‘미지’와 ‘상징’은 물리적 공간의 분화를 통해 더 극적으로 그 간극과 연결성을 보여줄 것이라 기대한다.
■ 작품 이미지
이동근 Lee Donggeun,〈기워진 중심시(모기가 된 메시아) Sewn central view points (Messiah turned into a mosquito)〉, 그림이 그려진 천을 바느질 Sewing fabric with drawings, 53 x 38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이동근 Lee Donggeun, 〈기워진 중심시(우리의 연대방식) Sewn central view points (our method of solidarity)〉, Sewing fabric with drawings, 55 x 39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기워진 중심시(3과 5의 시간) Sewn central view points (Time 3 and 5)〉, Sewing fabric with drawings, 195 x 115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기워진 중심시(유연한 배치를 위한 계획은 지켜본다) Sewn central view points (Plans for flexible composition
are watching)〉, Sewing fabric with drawings, 106 x 114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 (프란시스 케레를 위한) Handwritten drawing (for Francis kéré)〉, 종이 위에 마커, 볼펜 Marker, ballpoint pen on paper,18 x 25.5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 (원형 농장 중심의 마을 네트워크) Handwritten drawing (village network on a circular farm)〉, Marker, ballpoint pen on paper, 18 x 25.5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 (작은 동네의 나무 터치 놀이를 위한)〉, Marker, ballpoint pen on paper, 18 x 25.5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 (여유와 사랑의 동선 Handwritten drawing (travel of leisure and love)〉, Marker, ballpoint pen on paper, 18 x 25.5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 (선형적 도시와 분산형 도시를 위한 기초 리서치) Handwritten drawing (Basic research for linear and distributed cities)〉, Marker, ballpoint pen on paper, 18 x 25.5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 (선형적 도시와 분산형 도시를 위한 계획도) Handwritten drawing (plan for linear and distributed cities)〉, Marker, ballpoint pen on paper, 18 x 25.5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차가운 것을 뜨겁게 인식하기) Handwritten drawing (Recognizing cold things as hot)〉, Pen, pencil on paper, 18 x 25.5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산책로 중심 도시 계획) Handwritten drawing (promenade urban planning)〉, Pen on paper, 18 x 25.5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문화 산업단지 계획을 위한) Handwritten drawing (for cultural industrial complex planning)〉, Marker, ballpoint pen on paper, 18 x 25.5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얼룩위의 식물같은 도시 네트워크) Handwritten drawing (City network like plants on stains)〉,
Marker, ballpoint pen on paper, 20.5x23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얼룩 위의 스포츠 센터) Handwritten drawing (Sports Center on stains)〉, Marker, ballpoint pen on paper, 18 x 25.5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도시는 모기) Handwritten drawing (The city is a mosquito)〉, Pen, ink on paper, 25.5 x 18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수변 소형 도시 계획안) Handwritten drawing (waterside small city plan)〉, Pen on paper, 25.5 x 18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빈틈 없이 보려고 했는데) Handwritten drawing (I tried to see it perfectly but...)〉, Marker, ballpoint pen on paper, 25.5 x 18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파랑새) Handwritten drawing (Blue bird)〉, 펜, 토끼풀, 아크릴물감, 바인더 Pen, trifolium repens, acrylic paint, binder, 25.5 x 18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이제 막 계획을 시작했다) Handwritten drawing (just started planning)〉, Marker, ballpoint pen on paper, 25.5 x 18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정신분석학적 피보나치 수열) Handwritten drawing (psychoanalytical Fibonacci sequence)〉, Marker, ballpoint pen on paper, 25.5 x 18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인지 부조화의 틈을 채우는 수학) Handwritten drawing (mathematics to fill in the gaps of cognitive dissonance)〉, Marker, ballpoint pen on paper, 25.5 x 18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상하수도와 하천의 교류를 위한) Handwritten drawing (For exchange between water supply and sewage and rivers)〉, Marker, ballpoint pen on paper, 25.5 x 18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인간이 되기 위한 교통망시스템) Handwritten drawing (Transportation network system to become human)〉, Marker on paper, 25.5 x 18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감각적 교통로 찾기 놀이) Handwritten drawing (Finding sensory traffic route)〉, Marker on paper, 25.5 x 18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잠복천이 있는 지역 계획을 위한) Handwritten drawing (for planning areas with hidden streams)〉, Marker, ballpoint pen on paper, 25.5 x 18 cm, 2024
이동근 Lee Donggeun, 〈필기 드로잉(군산의 새 교통 시스템을 통한 계획안) Handwritten drawing (Plan for Gunsan's new transportation system)〉, Marker, ballpoint pen on paper, 25.5 x 18 cm, 2024
■ 전시 전경 (사진_양이언)
■ 전시 글
글_허경ㆍ철학학교 혜윰
오직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만,
- 이동근의 이미지/텍스트 작업, 그리고 현대의 조건
“완전히 합리적이 되려는 시도는 완전히 비합리적이다.” - 존 케이지
“놀이는 그 결과를 모르는 한에서만 흥미롭다.” - 미셸 푸코
“해설이 없었다면, 작품이 훨씬 명료했을 텐데!” - 프리드리히 니체
“오직 모를 뿐.” - 숭산 스님
1. 들어가면서 - ‘친절하지 않은’ 작업?
이동근의 작업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은 어려웠다. 기존의 비평을 모두 읽어보아도, 내가 쓰고 싶은 그런 이야기는 보이지 않았다(그리고 거의 모두 나처럼 조금 ‘난감한’ 상황에 직면하여 글을 썼다고, 나는 읽었다). 모든 작가의 모든 작업이 다 그렇겠지만, 내게 이동근의 작업은 이야기하려 들면 무한한 이야기를 해야 하고, 이야기하지 않으려 들면 전혀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그런 작업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차라리, 이동근의 작업은 이른바 해설이나 설명이 전혀 필요 없는 작업, 아무것도 감추거나 숨겨져 있지 않아서, 보는 대로 다 드러나는 작업,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명백하여 오히려 잘 보이지 않는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내게, 이동근의 작업은, 글이든 그림이든, 그냥 보고 느끼고 즐기면 되는 작업이다. 때로는 의미를 부여지 않는 것이 더 낫다. 물론 비평은 다른 일이다. 작가 노트가 해설이나 설명이 아니듯, 설령 그런 측면을 반드시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비평은 근본적으로 작가와 작업에 대한 해설이나 설명이 아니다. 비평 역시 비평가가 수행하는 또 하나의 작업이다.1) 하여, 나는 사정이 허락하는 한에서 작가와 대화하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쏟았다. 매번 두 시간에서 세 시간 정도 이어지는 서너 차례의 만남과 대화가 진행되어, 내 마음속에 작업에 대한 약간의 그림이 그려졌을 때조차도, 마지막 연결고리가 잡히지 않았다. 설명이든 해설이든 전혀 덧붙일 것이 없는 작업, 있는 그대로 명백하여, 그냥 보면 되는 작업,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기 드문 매우 지적인 작업, 얼핏 매우 심플하며 컬러풀하고 단순한 시각 이미지 작업,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말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 ‘궁금하다’는 의미에서 - ‘어렵다’고 말하는 작업, 각각 따로 놓고 보면 사실 어려울 것도 없지만, 이미지 작업과 함께 전시장에 놓였을 때 오히려 이미지와 관계가 무엇일지 잘 잡히지 않는다는, 그리하여 결국 관객들로 하여금, 이해하고 알고 싶지만 쉽지 않다, ‘난해하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키곤 하는 텍스트 작업, 관객들에게 작업에 접근할 수 있는 열쇠, 실마리, 단서를 충분히 주지 않는 작업, 그리하여, ‘친절하지 않은’ 이 이동근의 작업에 대해,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2. 대화
하여, 서너 번의 대면 만남 이후, 줌으로 이루어진 마지막 만남을 시작하기 전에(그리고 전시가 시작된 이후 ‘인스타 공개 라이브 대화’의 형식으로 한 번 더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이렇게 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작업을 통해서 결국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런 생각이 왜 하필 다른 방식이 아닌 바로 이런 작업으로 나타나는가? 그리하여, 당신 작업에서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는 무엇인가? 더하여, 나는 이런 질문도 들려주었다. 작가의 작업이 사실 그렇게 난해하다고만은 생각되지 않는다. 그런데, 실은, 원래 그렇게 생각하는지 하도 들어서 그런지, 작가 자신도 스스로 어느 정도는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왜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아니라면, 여하한 이유로든, 상당수의 관객들이 작가의 작업이 ‘어렵다’고 말한다면, 아마도 작가가 본의와 달리, 작가의 ‘말’이 관객에게 제대로, 여하튼 작가의 의도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은가? 어떤 경우이든, 한 사람의 작가로서 이러한 관객의 반응을 어떻게 보는가, 나아가 관객이란 작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가? 작가는 관객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니체가 말한 대로, 하나의 동일한 대상이 무한한 해석을 허용한다. 사실 관계가 틀리지 않은 이상, 올바른 해석 따위는 없다. 다만, 오늘날의 재즈가 말하듯, 조금 더 풍부한 해석과 조금 빈곤한 해석이 있을 뿐이다. 하여, 이 글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작가의 대답을 들은, 나의 재구성이다. 그리고 들뢰즈의 말대로, 내가 말하는 이동근과 그의 작업은, 이동근보다는 차라리 나를 더 잘 보여주며, 이때 나는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이동근을 발명하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느낌과 생각이 그 대상인 나만큼이나, 주체인 당신에 대해 더 잘 말해주는 것처럼. 내가 작업을 보듯, 작업이 나를 본다.
3. 관객과의 소통? - 인력과 척력의 장
이동근은 우선 자신의 작업이 관객들에게 여하한 이유로든 ‘어렵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나의 질문에 이렇게 말한다. “그런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오래 알던 동료 작가들도 종종은 너무 어렵게 느껴지지 않겠느냐는 말을 한다. 관객을 무시한다는 말과는 다른 차원이지만, 아마도 나 자신이 작가로서 관객과의 소통에 의식적으로 크게 관심을 두지는 않았던 것 같고, 이 부분은 앞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인 듯하다.”(이 글을 위한 나와의 대화에서 인용. 앞으로도 특별한 인용 표기가 없으면 마찬가지) 순순히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생각해 보겠다고 말한다. 이 주제는 사실 생각해 볼 부분이 많다. 오늘의 작가는 관객에게 자신의 작업이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 라는 문제를 어떤 태도로 바라보아야 할까? 사실, 우선, 관객과의 소통은 가능할까? 그리고 나아가, 바람직할까? 어떻게 해도, 결국 관객은 자신의 인식-지각 틀에 의해 작업을 바라볼 것이다. 스스로는 뭐라고 믿고 생각하든, 이는 작가든 관객이든 모두 마찬가지이다. 결국, 가다머의 말처럼, 모든 이해는 조금 더 섬세한 오해이다. 이 경우, 관객과의 소통을 지향하라는 윤리적 관심에 입각한 일반적 요청은 실은 핀트가 어긋난 말이다. 이는 이해를 향한 노력을 포기하라는 말일까? 오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라는 말일까? 이해란 무엇이고, 오해란 무엇일까? 이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합의하는 일은 단순히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김용옥의 탁월한 지적처럼, 미술에 대한 모든 정의는 미술을 바로 그렇게 정의하는 자의 관심을 반영한다. 이 바라보는 마음(關心)이란 interest의 라틴어 어원이 잘 보여 주듯 두 존재 사이의 관계(inter-esse), 곧 이해(利害) 관계이다.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은 니체나, 니체의 영향을 받은 푸코나 들뢰즈라면, 미술에 대한 모든 정의는 미술을 바로 그렇게 정의하는 자가 보여주는 힘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모든 정의(定義/正義)는 권력투쟁의 장치이다. 이해와 공감에 대해서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순진하고도 단순한 ‘이해-오해, 공감-몰이해’ 도식은 이 경우 별로 생산적인 효과를 발생시키지 못하며, 스스로 알든 모르든, 오직 특정 권력 정당화의 메커니즘 안에서 회전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도,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므로, 이해와 공감이란 것이 원래 불가능하므로, 아무렇게나 해야 할까? 아니면, 오해, 그러니까 보다 섬세한 어긋남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까? 이런 질문은 정답이 있을 수 없으므로, 어떤 것이 더 생산적인 효과를 발생시키는가를 살피는 것이 더 유익하리라. 정답이란 것이 있을 수 없으므로, 어떤 것이 더 좋은 현실적 효과를 낳는가를 살핀다. 아마도 이것이 니체 이래, ‘신이 죽은’ 시대, ‘정답이 없는’ 시대의 철학하는 방법일 것이다. 정답이 아니라, 방법이다. 옳고 그름 또는 도덕적으로 옳은가 그른가, 선한가 악한가가 아니라, 어떤 것이 더 큰 유익을 가져오는가? 맹자의 견리사의(見利思義)가 아니라, 견의사리(見義思利). 이익을 보면 정의를 생각하라가 아닌, 정의를 말하는 자를 보거든, 그가 그로부터 발생하는 어떤 효과를 누리는가를 살펴라.
현대의 예술은, 그렇다고 관객과의 소통을 반드시 배제하는 것도 아니지만, 반드시 소통하고 이해하고 공감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를 차라리 이해와 오해, 공감과 비공감의 놀이, 긴장되고도 즐거운 놀이라고 부르고 싶다. 하나의 놀이는 우리가 그 결과를 모르는 한도 내에서만 흥미롭다. 이해되고 이해하며 공감을 주고 받으며 나누는 재미만이 아니라, 관객의 입장에서는, 이해되지 않고 공감 안 되는 재미, 작가의 입장에서는, 이해받지 않고/못하고 공감받지 못하는 재미, 나아가 반드시 이해와 공감을 추구하는 것만은 아닌 재미를 바라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예술이 다 이해된다면, 그것에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더욱이, 레비나스와 데리다가 더할 나위 없이 명확히 이야기하고 있듯, 이해와 공감조차도 실은 무지막지한 지배와 폭력의 또 다른 양상이다(양상인 측면이 있다). 어떤 경우이든 이해와 공감만이 강요되는 세계는, 더욱이 그것이 예술의 세계라면, 참으로 매력(魅力, 우리를 끌어당기는 힘) 없는 세계가 될 것이다. 예술가의 과제는, 특정 시공간 속에서, 공감과 폭력, 끌어당김과 밀어냄, 당기는 인력(引力)과 밀어내는 척력(斥力)을 모두 포함한 특정의 장(場), 힘의 장을 구축하는 문제이다. 실은, 예술의 세계란, 만유인력의 세계인 만큼이나, 만유척력의 세계이다.
4. 이동근의 이미지와 텍스트 - ‘평행’ 이론
이동근의 기존 전시명은 다음과 같다. 2017년 <미지를 위한 부표>(금호미술관), 2018년 <구의 여집합>(사루비아다방), 2020년 <주름이라는 관측법>(공간형&쉬프트), 2022년 <돌연변이>(윌링앤딜링), 2023년 <보는 것과 서는 것>(인천아트플랫폼). 따라서 2024년 9월 6-26일까지 두 곳의 갤러리에서 정확히 동일한 기간 동안 펼쳐진 이번 ‘평행’ 전시, 곧 스페이스 카다로그의 <말 없는 눈 silent visions>, 페이지룸8의 <말 잇는 눈 connecting visions>은 여섯/일곱 번째 전시가 된다. 말 없는 눈과 말 ‘있는’ 눈이 아니라, 말 ‘잇는’ 눈이다. 두 전시의 작업은 각기 텍스트가 없는 작업과 텍스트가 있는/잇는 작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가 다시 풀어보자면, 이 텍스트가 있는/없는 작업들은 실은 텍스트-이미지를 잇는/잊는 작업들이다. 시각 이미지를 다루는 작가 이동근에게 텍스트의 부재는 실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여, 텍스트의 부재는 작업의 디폴트 값이다. 그런데 모든 이미지 작업 또는 전시는 제목을 가지므로 실은 텍스트가 있는 작업이다. 작가와 관객은 모두 자신만의 방식(들)로 이미지와 텍스트를, 실은 모든 것과 모든 것을 잇는다. 텍스트 없음은 텍스트 없이 이미지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만들기이고(말 없는 눈), 텍스트 있음은 텍스트를 통해, 이미지와 텍스트를 잇기(말 있는 눈)이다. 눈은 있지만 말이 없으면, 눈이 스스로 드러나고, 눈도 있고 말도 있으면, 눈은 말과 이어져 나타난다. 어떤 경우에도 눈은 있고, 말은 있다가 없다가 한다. 이동근은 “운이 이어져, 두 개의 전시를 동시에 진행하게 되었다. 이제까지 작업에서 결과만 보여주고 말, 그러니까 과정을 너무 안 보여준 것 같아서, 이번에는 말과 과정을 같이 보여주는 전시(<말 있는 전시>) 하나와 결과만 보여주는 전시(<말 없는 전시>)를 같이 해보면 흥미롭겠다고 생각했다.” 얼핏, 이동근에게 눈은 상수(常數, constants)이고, 말은 나타날 수도 아닐 수도 있는 변수(變數, variants)처럼 보이지만, 이동근이 ‘무제’라는 식의 제목을 개별 작업에 대해서도 전시에 대해서도 사용하지 않았고, 늘 ‘구체적인’ 어떤 특정의 제목을 붙인다는 사실로 볼 때, 이동근에게 말과 눈은 모두 상수들이다. 더하여, 시각 이미지 작업과 함께, 이동근은 - 2014년의 소설 <라다마 그바그보>(ladama gbagbo), 2015년의 소설 <세디낙>(sedinaaq)처럼 - 소설 또는 자유로운 에세이의 형식을 띤 텍스트를, 전시에 또는 독립적으로, 종종 붙인다. <라다마 그바그보>는 코트디부아르의 실존하는 전직 대통령ㆍ독재자 ‘로랑 그바그보’의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딸 ‘라다마 그바그보’를 화자로 내세운 수기(手記) 형식의 소설이다. 가령 이렇게,
“제법 오래 걸었다. 먼 거리를 여행하며 우리라는 협주곡 위에 점점 불협화음이 추가된다. 들리지 않던 거슬리는 소리의 주인공들. 총의 멜빵끈. 소년병의 콧구멍. 중사의 주머니. 누군가의 손톱. 점잖은 화음은 사라지고, 구차한 경련들의 몸부림이 신음한다. 손톱, 손톱, 콧구멍, 주머니, 주머니, 멜빵끈, 콧구멍, 손톱, 주머니, 손톱, 손톱, 손톱, 멜빵끈, 콧구멍…. 아. 살아남은 유일한 주술사인 걸음 소리는 그들의 난잡함에 고개를 떨군다. 이대론 안 된다. 나는 주술사를 일으킨다. 격렬히 저항한다. 걸음걸이의 빈도가 잦아지고 다양한 방향으로 관절을 이용하여 바닥을 제친다. 주머니, 멜빵끈, 스읕, 콧구멍, 슈웻, 시읕, 손톱, 멜빵끈, 슈틇, 팔꿈치, 멜빵끈, 주머니. 아. 안돼. 더 격렬히. 더. 엉덩이를 흔들고 허리를 젖히고 어깨와 팔의 탄력을 이용해서. 쉩, 팔꿈치, 퉤스, 멜빵끈, 개머리판, 스퉙, 슓, 손톱, 주머니, 주머니, 쉬펣, 쉐엻, 팔꿈치, 슓, 췗, 손톱, 듋. 목을 꺽고 골반을 흔들고 격렬한 전율에 몸을 맡긴다. 그래. 조금 더, 조금만 더, 하면 돼. 저 어리숙하고 구차한 것들을 닦아버리자. 이마가 젖어들고 잔머리가 어설프게 붙어버린다. 목과 가슴골을 지난 땀방울의 행렬은 배꼽을 지나 다리 사이로 전진한다. 모든 곳이 젖어 든다. 불결한 신음들이 점점 주눅이 든다. 하나둘씩 존재의 주술 앞에 고개를 숙인다. 치유의 주술만이 무아지경의 상태에 들어간다. 그래. 쓰레기들 우릴 받들라. 닥치고 고개를 들지 말지어다. 이제야. 됐나. 진이 빠진다. 온 우주가 다 함께 어디론가로 힘을 빼앗긴다. 쑤욱. 전원이 뽑힌다.”
피디에프로 22장쯤 되는, 마치 레몽 루셀의 소설처럼 읽히는,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건 뭘까?, 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로서는 이런 소설, 이 소설이, 매우 흥미롭다.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고, 프랑스 현대철학으로 학위를 받고, 그에 따라 현대 비평이론을 공부한 내게는, 사실, 이런 글이 오히려 친숙한 편이다. 하지만, 이 소설과 이미지 작업 사이의 연관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에 생각이 미치면, 다시금 생각이 복잡해진다. 아무런 연관이 없이 그냥 읽으면 되는 걸까? 혹은 여기에는 ‘연관 없음의 연관’(프랑스 현대철학자들이 비-관계(non-lieu)의 관계라 부르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어차피 알 수 없다. 2015년에 발표한 또 다른 소설 <세디낙>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캐나다든 그린란드든 스웨덴이든, 여하튼 북극점에 가까운 어느 곳의 이누이트족, 정확히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을 화자로 내세운 소설이다. 가령, 이렇게.
“아버지의 눈은 흙더미와 바위에 눌린 채 바다를 향하고 있다. 깜빡이지 않는다. 어떤 의지가 있는 듯한 시선으로 일각수의 뿔춤을 보고 있다. 이 상태, 아니 이 상황을 멍하니 보고 있다. 개들은 저 멀리서 애타게 짖고 낑낑거리기를 반복한다.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도 않는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다가 정신을 차리고 창으로 아버지 주변의 흙을 파낸다. 하얀 털옷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땀이 난다. 쉬지 않고 흙을 파내고 바위를 던진다. 거친 호흡을 쉬지만 무슨 약이라도 맞은 듯 신체적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 몽롱한 상태에서 아버지를 끄집어내 얼음 위로 끌고 나온다. 눈을 보고 무엇이든 물어보지만 답이 없는 답으로 나를 마주한다. 가슴을 때리고 인공호흡을 시도한다. 퍽, 퍽, 퍽.”
이동근의 두 소설은 모두 아버지를 바라보는 다 큰 딸의 시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는 어떤 (무의식적) 의미가 있을까? 도식적이거나 그렇지 않은, 무한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나는, 알 수 없고 묻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조건에서만,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작가와 많은 대화를 하고 많은 질문을 묻고 또 대답을 들었지만, 내가 지금 다른 글, 가령 반듯하고 사람들이 ‘비평’이라 부르는 그런 글, 단정하고도 심플하며 정확한 글을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반복하건대, 나는 그런 글쓰기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런 글은 남들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안 읽어도 되는’ 글들이 넘쳐나는데, 거기에 내가 한 편을 더 보탤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런 글은, 매력이 없다. 푸코가 말하지 않았던가? 하나의 게임이 재미있는 것은 오직 우리가 그 결과를 모르는 한도에서라고. 나는 나 자신도 마지막을 모르는 글을 쓴다. 그런 글이, 나를 나의 바깥으로 데려간다. 오직 알 수 없으며, 오직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만, 오직 모르기 때문에만 쓸 수 있는, 그런 글.
하지만, 이 부분에서, 문제는 이것이다. 이동근의 텍스트 작업(소설)과 이미지 작업(설치와 그림) 사이의 관계는 무엇일까? 작가의 의도는 있겠지만, 어차피 무한히 묻고 또 물어야 하므로, 어느 순간에는 그쳐야 한다. 이 모든 것은, 결코 확실히 또는 결정적으로 알 수 없으며, 실은, 때로는 모르는 것이 차라리 낫다. 현대란 ‘재현 작용(representation)을 더 이상 믿지 않는 세계’를 이르는 말이기 때문이다. 현대는 ‘마지막 한 마디’가 부재하는 세계이다. 현대란 이러한 다양한 해석을 용인하고, 권장하는, 나아가 강요하는 세계이다(이를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현대를 살면서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혹은, 누군가가, 이런 소설을 읽고 이건 뭐야?, 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모든 생각은 아마도 글 자체보다는, 미술에 대한 그 누군가의 선입견이 작용한 탓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단적으로, 이는 글의 작가 이동근이 ‘내가 아는, 보다 정확히는,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미술과 작가의 개념 안쪽에 위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이 소설이, 실은 알 수 없는 것이 전혀 없고, 실은 이해할 것조차 전혀 없는데(나는 이 글을 쓰려고 대화를 나누고 생각을 정리하며, 점차 ‘이 생각이 맞다’는 생각으로 기울었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소설-미술의 이른바 ‘작가’ 개념의 그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에 내게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작업으로 비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볼 때, 이동근의 작업은 물론, 이동근의 글도, 이동근이라는 작가도, 누군가에게는(실은, 관심이 있는 누군가에게만), 조금 ‘이상하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5. 이상한 사람, 이상한 작업? - ‘지배당하는’ 정상들
이런 바깥의 작가 이동근에게 나는 다음과 같은 이상한 질문을 던져보았다. 당신은 왜 이런 작업을 하는가, 그리고 그런 생각이나 의도가 왜 하필이면 다른 방식이 아닌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는가? “나는 종종 어떤 사람이 자신만의 정원을 이렇게 또는 저렇게 가꾼 것을 본다. 그리고 그 정원을 보고 있노라면, 그 정원이 어떻든, 이런 정원을 이렇게 꾸미고 가꾸는데, 이 사람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였고, 보통 노력과 정성으로는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나는 그런 사람, 그런 장면을 보면, 내 안에 울컥하는 감정이 생기는데, 나도 바로 그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나는 사람들이 이동근이라는 이상한 사람이 있었고, 그가 내게 늘 꼭 이해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저러한 결과를 내기 위해 어마어마한 시간과 공을 들였던 사람,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나는 이해가 어렵고 드문 이 시대,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한다.” 이는 실로 이상한 답변이거나, 혹은 이상할 것이 전혀 없는 안 이상한 답변일 수 있다. 이상함 또는 이상함의 여집합. 상식은 다만 비상식의 여집합이다. 이상함이란 이상하지 않은 사람의 여집합이다. 그렇다면, 이상(異常)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보통(常)과 다르다(異)는 것이다. 가령 이상하다는 것은 때로 비정상(非正常), 정상(正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할 수도 있는데, 이때 이상하다, 정상이 아니다, 비정상이라는 말은 그저 단순히 그런 사태 혹은 사람의 ‘숫자가 적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른바 ‘색약ㆍ색맹’(色弱ㆍ色盲) 등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한국인의 경우 대략 0.5~6.0% 정도의 확률분포를 보인다고 한다. 그런데 만약 이런 사람들이 더 다수를 차지한다면 이들이 색약 또는 색맹이라 불릴 리가 만무하다. 간단히 말해, 정상과 비정상 또는 이상은 숫자의 문제이다. ‘지배적’ 정상이 지배당하는 다른 정상들, 곧 자신과 다른 정상들을 모두 비정상들, 이상한 것들이라 명명한 것이다. 따라서 정상과 비정상, 이상한 것과 이상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배적’ 정상과 ‘지배당하는’ 정상들이 있을 뿐이다. 이상한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으며, 그저 자주 못 보아서 그렇게 보일 뿐이다. 나도 너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 우리 모두 그냥 이렇다는 것, 내가 볼 때, 이동근이 자신의 작업과 삶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6. 이동근의 공간적ㆍ기하학적ㆍ집합론적 은유 - 합리성과 그 한계
한편, 이동근의 작업은, 가령 <구(球)의 여집합>처럼, 시간적이기보다는, 대부분 공간적-기하학적 또는 집합론적 은유를 기저로 삼고 있다. 실로 ‘이과적인’ 이동근의 세계는 미술/예술/기술(美術/藝術/技術)이 같은 하나의 그리스어 단어 τέχνη(tékhnē)에서 연원한 동근원(同根源)적인 단어들임을 보여준다. 이 그리스어 단어는 사실 어떤 기억, 기술과 예술, 심지어 때로는 이전 시대의 주술과도 분리되기 이전의, 기억을 품고 있다. 따라서 이동근에게 과학과 기술과 예술과 주술은 모두 같은 근원을 갖는다, 하여, 분리 불가능하다. 모든 기술과 과학이, 그리하여 예술과 주술이, 실은 인간학이다(어떤 특별한 근거도 없는 의역, 19세기 일어 번역 ‘인문학’(人文學)이란 용어는 이제 폐기 처분되어야 한다). 기술과 과학처럼, 인간학으로서의 예술은 인간의 정의(定義)를 탐구하며, 바로 그럼으로써 인간의 정의를 바꾸는 학문이다. 전통적 ‘회화과’를 나온 이동근이 ‘과학기술’이라는 이름이 붙은 학교의 대학원을 나온 것은 우연이라 치더라도, 예술가이자 미술작가인, 이동근의 전시 제목은 물론, 개별 작품의 제목 중 상당수 역시, 현저히 ‘이과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가령, <관측일지: 병합>(2020), <시선으로 펼쳐진 너>, <접기, 결합: 서기>, <다시 선 각막>, <생장한 각막>, <각막 혹은 시선>(이상 2022), <생장중인>(2023), 이 모든 것은 이동근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이동근의 이러한 기하학적ㆍ집합론적ㆍ생물학적 특징, 여하튼 ‘이과적’ 특성은 이동근이 발을 디딘 합리성의 세계라고 말하고 싶다. 오늘 세계를 지배하는 서양의 경우, 세계와 우주에 대한 수학적 관념은 서력 기원전 6-5세기 피타고라스를 필두로, 기원후 17세기 초중반 이후의 과학혁명, 18세기 중후반 이후의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며, 가히 세계의 오늘을 지배하는 사유이다. 특히 17세기 이래 데카르트-라이프니츠, 갈릴레오-뉴턴으로 대변되는 과학적 사고방식은 세계에 대한 수량화에 기초한 사고방식이다. 양적 방법론은 질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나의 이성과 너의 이성은 동일하다. 이러한 동일성에 기초한 양적 보편성의 관념이 이후 정치적 민주주의의 관념을 낳았다. 이는 근대 합리성의 모태인 이성(理性, reason, rationality)의 모태가 되는 라틴어 ratio가 계산(計算, caculation)을 의미하는 단어라는 사실에서도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결국, 이성의 세계는 ‘딱 맞아떨어지는’ 세계이다. 이동근은 불확실한 세계에서 확실성을 추구하는 데카르트처럼, 과학적 합리성에 기반하여 자신의 작업을 펼친다. 그리고 이동근의 작업은 합리성의 한계와 조건에 대한 작업으로 나아간다. 왜냐하면 합리성은 세계의 수량화에 기초한 사고방식인데, 이것이 효과를 내는 영향만큼이나, 이것이 잘 들어맞지 않는 영역이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동근의 텍스트 작업과 이미지 작업은 모두 이러한 합리성의 한계/조건에 대한 작업이다. 이동근은 세계의 이 틈새, 사이, 간극, 이 약간 어긋남을 다루는 작가이다. 따라서, 정확히 말할 수도 없지만, 정확히 말한다는 것도 한계가 역력하다. 따라서, 이동근의 작업은 아이러니와 불합리, 부조리에 대한 말놀이, 또는 말풍선처럼, 보이게 된다.2) 말놀이는 말장난이 아니다. 이동근은 진지하며, 진지하고 정확하고자 하기 때문에만, 말놀이와 그림놀이를 수행한다. 이동근은 정확하게 말하기 때문에만, 부정확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찬가지로 이동근은 정확히 그리기 때문에만, 부정확하게 그리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이동근의 한계가 아니라 이동근의 탁월함이며, 이동근이 다루는 시각적ㆍ언어적 작업 자체의 한계/조건에서 기인하는 하나의 놀이로 바라보아야 한다.3)
결국, 이동근의 작업은, 자신과 세계에 있어, 이미지/텍스트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작업, 그 사이와 틈을 재규정하는 작업, 이 연접/이접의 작업, 잇고/잊는 작업, 둘 각각의 정의와 둘 사이의 관계를 재규정하므로써, 그들을 (다시) 분류하는 작업이다. 모든 ‘참다운’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이동근은 이러한 작업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의식/무의식을, 나/세계를, 이미지/텍스트를 (재)구성, 곧 (재)발명하고 있는 것이다. 말/눈은 분리될 수 없는/있는 하나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동근은 둘 각각을 그리고 둘 사이를 잇고/잊는 작가이다.
7. 나가면서 - 오늘의 예술가, 오늘 나의 조건으로 작업하는 자
이른바 현대 비평의 조건이란 무엇인가? ‘결국 설명할 수 없음’이라는 이른바 부정적 한계를 ‘오직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라는 긍정적 조건으로 달리 바라보는 것, 이는 결국 현대 미술, 현대 예술 일반의 조건과도 일치한다. 설명할 수 없으므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 수행 주체가 이제까지 스스로는 ‘설명’한다고 믿어왔던 것, 즉 이미지의 보조 ‘수단’이라고 생각한 글과 텍스트는,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나 해설이 아니라, 실은 작업 자체, 적어도 작업의 일부다. 모든 작가가 정확히 알고 있고, 실제로도 바로 그렇게 지금 행하고 있듯, 개별 작업 또는 전시의 ‘제목’은 - 결코 작업에 대한 설명이나 해설이 아니라 - 19세기 메이지(明治) 일본인들이 이른바 ‘(사람들 앞에) 펼쳐 보이기’(展示)라고 번역한 어떤 특정 놀이, 관객과의 ‘놀이’ 중 일부다.
당신은 당신이 그리는 것이다(you are what you paint). 이는 당신이 있고, 당신이 무언가를 그리면, 그것이 당신이라는 말이 아니다. 내가 있고, 그 내가 옷을 입는 것이 아니다. 나란 내가 지금 입은 이 옷과 내가 빚어내는 특정한 ‘복합체’다(이것이 그레이엄 하먼이 말하는, 객체지향존재론(OOO)이다). 이런 옷, 저런 옷을 입은 ‘나들’만이 존재하며, 이들을 가로지르는 메타적 존재, 데카르트적 실체로서의 코기토, ‘나’는 없다. 이러한 세계관은 옷을 모두 벗은 상태도 옷을 입은 상태의 하나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나체가 의복이다. 무제가 제목이다.
유럽, 20세기 초, 어떤 특정 순간, 작가들은 이미지에 대한 텍스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무제’(無題, untitles)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영어 untiltled라는 용어는 1610년 최초의 용례가 발견되지만, 20세기 예술에서 이런 지칭이 사용되기 시작한 이유는 - 가령 ‘표제음악’의 경우처럼 - 텍스트 혹은 주제가 텍스트로 이루어지지 않은 예술 작업의 해석을 지배하는 현상을 탈피하기 위하여 고안된 지칭일 것이다(이렇게 보면, 20세기 이전까지의 모든 미술작품은 전혀 예외 없이 ‘표제미술’이었다). 따라서 ‘무제’라는 지칭은 예술이 이른바 주제와 내용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고유한 매체적 특성 혹은 형식적 놀이 그 자체에 집중하면서 생겨난 사태였을 것이다. 예술은 예술 그 자체의 조건과 규칙이 있다. 그것을 존중해라. 언어와 텍스트로 환원하지 마라. 이는 실로, 기원전 4세기 플라톤 이래 23세기를 이어온, 텍스트와 진리의 지배에 대항하는 유럽 예술가의 독립선언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가령 파울 클레와 바실리 칸딘스키와 르네 마그리트 그리고 또 셀 수 없는, 20세기 초반 유럽 현대 예술과 미술의 위대한 천재들이 이미지-텍스트 사이의 평행선 이론을 개발했다. 이미지와 텍스트는 두 개의 별개 존재들이되, 어느 하나가 나머지 하나로 환원되거나, 하나에 의해 다른 하나가 소거될 수도 없는 영원한 평행을 이루는 쌍둥이들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텍스트가 미셸 푸코의 1968년 쓰인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일 것이다. 이 책이 잘 보여주듯, 이러한 사유방식은 19세기 후반 니체와 말라르메로부터 준비되, 20세기 초, 소쉬르와 프로이트와 가령 레비스트로스와 라캉에 의해 대변되는 비본질주의, 비실체적, 반토대주의적(non-essentialist, non-substantial, anti-foundationalist) 사유의 탄생과 분리 불가능한 방식으로 관련되어 있다. 마치 ‘20세기 유럽 동시대 예술’(the 20th century european contemporary art)이라는 고유명사가 오늘 이곳에서 그저 ‘현대예술’이라는 보통명사로 번역되듯, 세계는 그리스와 유럽과 서양이 지배하고 있다. 스스로는 무어라 생각하건, 거의 단 한 명의 실제적 예외도 없이, 우리는 모두 그리스-로마-유럽-서양의 자식들이다(pax graeca). 보편성은 결코 보편적이지 않으며, 오직 정치적일 뿐이다.
오늘-여기, 다시 1세기 이상이 흐른 오늘, 지구의 반대편 혹은 다른 문화와 사회 속에서 태어나고 사는, 오늘-여기의 예술가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 모든 것을 포월(包越)하며, 오늘-여기의 새로운 규칙을 모색하고 있다(나는 이를 규칙의 개인화라 부른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하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닌 자세, 문제를 유지할 줄 아는 태도는 오직 그러한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다. 이동근의 말과 이미지 작업은 이동근이 문제를 유지하는 능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섣불리 함부로 말하거나 결정하지 않고, 그저 그렇게 놓아둔다, 그리고 오늘-여기에서 이것으로 작업한다, 논다, 그러한 현실과 과정 자체를 작업으로 삼아 수행한다(work, play, perform). 이동근은 이 작업이 어떻게 펼쳐지고 어떻게 끝날지 알지 못하는 한에서만 작업한다, 한계를 조건 삼아.
“변화의 가능성이 다양하고 더 많아질 수 있다고 생각한 이후, 더 불안정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자주 많은 변화를 줄 수 있는 상태를 바랐다.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지만, 유연한 천이나 끈, 종이와 같은 재질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특정 상태의 과정은 그 자체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또 다른 이미지를 더하도록 촉구했다. 그렇게 병합되다가도 이후 또. 과하여 덜어내기도 한다. 평면상의 생장과 수축의 변주는 결국 또 다른 차원을 마주하게 된다. 그 면은 만두를 싸듯 끝과 끝이 연결되어 입체로 변화하게 된다. 그 상태로 어느 정도의 변화를 가진 후, 또다시 접합되었던 곳과 다른 배면이 갈라진다. 이 과정을 두세 번 거치고 난 뒤, 보는 느낌에서 오는 만족감이 극대화되어 진행을 멈춘 것이 <생장한 각막> 시리즈이다.”(<생장한 각막> 시리즈에 붙이는 작가 노트, 2023)
그리고 이것이 바로 작가 이동근의 탁월한 측면이다. 이동근의 작업은 바로 이런 오늘-여기 새로운 규칙의 탐색 작업을 보여주는 모범적 사례이다. 결코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이런 이상한 사람 하나쯤은 있어도 되지 않겠느냐고 우리에게 되묻는, 다정하고도 무뚝뚝하며, 속마음을 털어놓으면서도 하나도 말하지 않는, 애처로움과 무심함을 함께 품게 만드는, 동시에 이 모든 것이며 이 모든 것이 아니기도 한, 이동근은 바로 세계의 이러한 얼핏 모순적이며 아이러니컬한 모습이 전혀 모순적이지도 아이러니하지도 않음을, 모순적이고도 명확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이동근은, 세계의 틈과 사이를 존중하는 태도, 섬세한 어긋남을 강력히 유지하는 태도를 통해, “완성되지 못한 문장의 띄어쓰기, 의지와 다르게 쉬어버린 숨과 같은 것”을 보여주며, “너무 이른 적절함에 당면하지 않기를 바라며, 또 다른 틈에 백지를 놓아”(작가 노트 <도래하는 것을 향한 각막과 생멸의 운동>, 2022) 두는, “파편(평면)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그것이 접합된 최종 상태 또한 여전히 변화가능한 불안정한 상태이길”(<다시 선 각막>에 붙이는 작가 노트, 2023) 바라는, 이동근의 작업은 확실성만큼이나 불확실성을 견디는 능력, 문제를 섣불리 해결하는 것이 아닌, 문제를 유지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가령, 유령인 동시에 망토인, 이동근이, <유령망토>에 붙인 2023년 7월 23일의 ‘작가 노트’가 보여주는 것처럼.
“어딘가에 들어가 있기를 바란다. 포근하게. 하지만, 애처롭게도 여전히 외부가 어디에나 있다. 보는 순간 외부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 틈과 어긋남. 잘 알지도 못하지만 그렇게 존재하는 친구 정도는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보는 것이 존재하는 것으로 생장하길. 그리 바라는 마음은 결국, 누더기가 될 수밖에 없었던 너의 몸을 통해 드러난다. 태어난 이래로 단 한 번도 완전한 적 없던 나이기에 그것의 뒤집힌 껍질 또한 당연히 그러한 것이지 않을까. 그것이 상징이 된다 한들, 또 다른 목소리가 다가올 때를 위해, 다시 반복한다.”
이동근은, 결코 저것이 아닌, 오직 이것만을 가지고 작업한다.
■ 작가 약력
이동근
b.1985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
학력
2017서울과학기술대학교,조형예술과,석사졸업
2010 홍익대학교,회화과,학부졸업
개인전
2024 말 없는 눈, 카다로그, 서울
2024 말 없는 눈, 페이지룸8, 서울 (카다로그 기획)
2022 보는 것과 서는 것,인천아트플랫폼G3, 인천
2022 돌연 변이, 스페이스윌링앤딜링, 서울
2020 주름이라는 관측법,공간형&쉬프트, 서울
2018 구의 여집합, 프로젝트스페이스사루비아다방, 서울
2017 미지를 위한 부표, 금호미술관, 서울
단체전
2023 접촉 환원, 스페이스카다로그, 서울
2023 유령 망토, 드로잉룸, 서울
2022 터치 스톤, 신한갤러리역삼, 서울
2021 작은 모닥불 앞에 둘러앉은 소원들, 스페이스카다로그, 서울
2021약속의 땅, 더그레잇컬렉션, 서울
2020 너머의 여정, 세마벙커, 서울
2020 연대의 홀씨,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광주
2019 사용된 미래, 수림아트센터, 서울
2019 유어 서치 내손안에 리서치 서비스, 두산갤러리, 서울
2018 깜빡일수록 선명한, 두산갤러리뉴욕, 미국
2016 언더 마이 스킨, 하이트갤러리,서울
레지던시
2022 인천아트플랫폼E-01
Lee Dong-geun
b. 1985, Daejeon, Korea.
Lives and works in Seoul, Korea
Educatios
2017 Seoul National University of Science & Technology. Dept. of Fine Arts, MFA, Fine Arts
2010 Hong-ikUniversity, College of Fine Arts, BFA, Painting
Solo Exhibitions
2022 Seeing and Standing, In-CheonArt Platform, G3, In-Cheon, Korea
2022 Mutant, another surface, Space willingndealing, Seoul, Korea
2020 An observation through wrinkles, HYUNG & Shift, Seoul, Korea
2018 The Complements of Sphere Arrangements, Project Space Sarubia, Seoul, Korea
2017 The Buoy for Unknown, KumhoMuseum, Seoul, Korea
Group Exhibitions
2023 Contacting presence, Space Cadalogs, Seoul, Korea
2023 Ghost Manteau, drawingRoom, seoul
2022 Touch-Stone, Shinhan-Gallery, Seoul, Korea
2021 Wishes Sitting Around A Small Bonfire, Space Cadalogs, Seoul, Korea
2021 The Promised Land, The Great Collection, Seoul, Korea
2020, The Journey of Eternity, SEMA Bunker, Seoul, Korea
2020, SOLIDARITY SPORES, ACC, Gwang-ju, Korea
2019, Used Future, KimHeeSooArt Center, Seoul, Korea
2019, Your Search, On-demand Research Service, Doosan Gallery, Seoul, Korea
2018, Tenacious After Image, Doosan Gallery, Newyork, USA
2016, UNDER MY SKIN, HITECOLLECTION, Seoul, Korea
Residency
2022, Incheon Art Platform, E-01